얼마 전 한 시인의 작가론을 청탁받았던 이유로 한동안 그 시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작품론도 파고들기 힘든 분야지만 작가론은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상황을 뭉뚱그려 생각해보아야 했다. 한 작가의 삶과 작품을 무분별하게 횡단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전에도 한 번 썼던 적이 있는 작가라 쉬울 것 같으면서 어려웠다. 그러나 늘 하나의 맥락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나 필자나 작품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실을 뚫고 들어가거나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작품은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현실을 넘어선다. 이 시인이 통과하는 그 지점은 독특하다.

'꿈꿀 때마다 내가 지나가야 하는 그 골목 끝에 석상처럼 굳어있는 소녀. 소녀의 다리 아래엔 공포에 질린 그녀의 밀납 같은 얼굴이 떨어져 있네'('소름' 부분-'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 김참).

이 시인은 꿈을 복기하여 시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첫 시집부터 일관된 시작법을 유지해 온 그의 꿈같은 환상세계는 변함이 없다. 푸른 바다가 있고 도라지밭이 있고 저수지가 있는 그곳을 그는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 현실을 환상으로 치환해버리는 그의 시작법의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번 네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의 재현이 아닌 꿈과 환상세계를 넘어가는 그 길목은 항상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현실을 견디기 위한 환상시나리오가 아닌가요?" 나는 사석에서 대놓고 묻고 말았는데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사람들이 불안을 다루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환상은 주체가 자신에게 일관성을 제공해 주는 시나리오, 이야기를 만들어 결여를 덮는 방법이다. 환상은 주체가 불안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불안들', 레나타 살레츨)는 것이다. 어린 시절 영화에 열광한 군인이 한 전장에서 심리적 방어기제로 자기가 전쟁영화에 출연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전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멀리서 들리는 폭발음과 하늘 높이 솟는 포연이 특수 효과 팀이 만들어낸 폭발장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환상 시나리오는 바로 옆에서 동료가 유탄에 맞아 쓰러지거나 눈앞의 폐허 속에서 참혹한 시신이 무더기로 드러날 때 무참히 깨지면서 신경증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살은 불안한 삶을 지탱해주는 환상 시나리오가 깨지는 순간에 벌어지는 극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일이 빈번하다. 예측 불가능한 불안은 닥쳐 온 재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환상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는 지점이라는 말이다. 그런 속에서 일상생활은 열대야처럼 이유 없이 찌뿌듯하고 짜증을 유발하고 있다. 지난 5일 저녁, 의자를 지탱하고 있던 거실의 바닥이 흔들린다고 느꼈던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잠깐 사이 두 번째 진동이 있었을 때도 공포 그 이상을 넘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경험이 없었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무정부주의적 재난 상황이었다. 지진이었다. 먼 바다 먼 나라의 일로 알았던 지진이 내 삶의 바닥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지난 5월에 일어난 강남역 노래방 살인사건은 피의자가 아무런 연고 없이 이제 막 사회에 편입한 20대 여성을 이유 없이 살해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재판과정에서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느니, 여성에게 계속 무시를 당해온 보복으로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이니 설왕설래 했지만 이유가 없다는 것은 재난이다. 강남역 주변과 전국에 2만 장이 넘는 추모의 포스트잇이 붙었다는 것은 나도 내 아이도 재난을 당하듯 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성들이 감지했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결과적으로 불특정다수에게 해를 끼친 범죄행위이다. 라면이나 샴푸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쇼핑한 물품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 독이 되었고 희생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수용 가능한 적재량의 배가 넘는 철근과 화물들을 꾸역꾸역 채워 넣은 배를 타고 꿈에도 의심 없이 수학여행에 나섰다가 희생된 아이들에게 잘못을 뉘우칠 자들은 남았으나 아이들은 이미 돌아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집 안에서도 불안이 우리를 흔들어대는 시대에 집 밖의 불안을 누가 책임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개인이 물질 만능 주의적 자본이나 공공의 이익에 희생자가 되는 상황은 재난의 수준이다. 불안이 극심해진 한 조현병자는 연고 없는 개인의 희생을 불러왔다. 불안이 난무하는 시대에 위험한 신경증자가 되지 않으려면 개인은 모두 제각각의 환상시나리오를 써야 될 것 같다. 한 시인이 불안하고 조잡한 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바다와 도라지 밭으로 날아가는 시들은 지금 이 시대의 불안한 재난 앞에 선 현대인들의 꿈을 대신 복기하는 환상시나리오로 읽힌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