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울산 경남(PK)에서 김무성 대표를 대신할 만한 인사로 누가 있느냐." 새누리당 참패라는 '반전 드라마'를 쓴 20대 총선이 끝나고 며칠 뒤 국회에서 만난 자칭 정치 논객들은 어김없이 기자에게 물었다. PK 여권에 앞으로 정치적으로 투자 가치가 있는 상품이 있느냐는 이야기다. 총선 민심을 바탕으로 차기 대선은 물론 향후 정치 지형의 변화에 대한 식견들을 늘어놓다 나온 질문이다. 정치 단증이 있다면 이들도 유단자쯤은 된다. "여야 대권 주자들이 모두 PK 아니냐"고 항변하긴 했는데 내심 찜찜했다. 뭔가 내공이 달리고 자존심도 다소 상했던 것 같다.

몇 차례 더 비슷한 질문을 받고 생각해봤는데 이렇다 할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줄었다고 해도 새누리당 당선인이 40명 중 3분의 2가 넘는 27명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상품의 종류도 다양하고, 왠지 좋아 보이기도 한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있고, 남경필 경기지사도 요즘 부쩍 활발히 움직인다. 서울에도 총선 패배로 빛이 좀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오세훈 전 시장이 반짝인다. 대구·경북산인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있다. 50대인 이들은 모두 '신상품' 이미지다. 그런데 PK에는 이들과 비교할 만한 상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최근 PK 여권 상황을 보면 앞으로도 나올 수 있겠나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요즘 새누리당은 '총선 시즌2'가 한창 진행 중이다. 원내대표 선출 이후 이어진 혁신 논쟁, 그리고 비대위·혁신위 비토 사태 등 당 재편을 위한 다양한 레퍼토리가 이어지고 있다. 갈라서든, 대충 봉합하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비박근혜)계의 우격다짐은 사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당 헤게모니를 누가 잡느냐는 것인데 국민 생활에 크게 불편함을 주지도 않는 소재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25년간 지역에서 큰소리쳐왔던 PK 여권의 드러난 '민낯'이 안쓰럽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지경인데도 철저히 주변인에 머물러 있다. 수도권과 대구·경북, 충청권의 리그다. 나서서 이야기하는 인사도 없지만, PK 입장이 새누리당 혁신 논쟁의 변수가 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총선 참패와 구심점 공백 때문도 아닌 것 같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의석수가 가장 줄었다고 해도 인구가 배 이상 많은 서울·경기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오더에 충실히 따르고 줄을 선 대가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PK 여권 스스로가 실력으로 착각했던 지역주의 우산 아래에서 '정치적 발달 장애'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대로면 20대 국회에서 PK가 여권 내 무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전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다시 원희룡 남경필 오세훈 유승민을 돌아보자. 이들은 저마다 '쇄신' '협치' '무상급식''증세' 등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화두로 이슈를 이끌었다. 이들이 여권의 미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지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깨지고 망가지는 단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자체로 상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PK 여권을 지탱해주던 지역주의는 이번 총선을 통해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PK 여권의 입장에서 보면 20대 총선 전까지 PK의 정치 환경은 '정치적 식물 상태'가 오히려 차기에 득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냉혹한 정치적 경쟁 체제로 들어섰다. 변화된 환경은 PK 여권에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도 하지 않나. 20대 국회에서 PK에 다시 정치 불길을 댕길 '신성'을 기대해본다.

서울정치부 차장 ya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