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BIFF)는 김동호라는 인물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영화제와 김동호는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제가 시작된 1996년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아 15년간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속에서 살다시피 했다. 물론 이후 명예집행위원장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고 해도 영화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보우 타이를 맨 그의 모습을 오는 10월 영화제 때 다시 볼 것 같다. 이번에는 부산시장이 맡아오던 당연직 BIFF 조직위원장 자리에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위촉돼 스크린 앞에 복귀하는 무대다. 하지만 떼밀리다시피 맡겨진 그 자리가 그에겐 영광의 길 보다는 가시밭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동호 조직위원장이란 타이틀은 지난 20개월 동안 부산시와 BIFF 측이 벌인 지루한 공방전의 산물이다. 2014년 영화제 때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 벨' 상영을 두고 빚어진 갈등이 곪아 터졌지만 양측은 환부를 도려내기보다는 일단 김동호라는 응급 붕대로 덮어씌우는 데 합의했다. 무산위기까지 몰린 올해 영화제를 일단 치르고 난 뒤 상처를 감싼 붕대를 풀고 고름을 짜낼지 도려낼지를 두고 다시 협상하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김동호는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다. 세계 영화계의 거장이자 주당들과 '타이거 클럽'이라는 폭탄주 사모임까지 만들어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 영화제로 키웠다. 영화제 초기 남포동과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영화인들과 소주잔을 비우고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며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제를 정착시키고 성장시켰다. 이제 와서 팔순의 상노인 김동호에게 폭탄주 잔을 들고 그런 역할을 다시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동호의 늙은 어깨 위에 얹힌 짐은 폭탄주의 알코올보다 더 그를 괴롭힐 것 같다. 부산시는 책임성과 공공성을, 영화계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며 김동호의 등을 떼밀고 있다. 이 모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그런데 양측은 상대의 요구와 주장에 정치적 노림수가 있다는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는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탓하는 꼴이다.

사실 영화제가 거듭되고 성장하면서 이런저런 성장통을 앓고 있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특정 인맥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비판이나 충고를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무조건 배척하고 배제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나와 봐야겠지만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등 집행위 간부 4명이 업무상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된 것도 당혹스럽다. 또 20년 전 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했을 때 "부산 촌놈들이 무슨 영화제냐"고 했던 서울사람들이 이제는 "부산 촌놈들이 영화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며 지역, 지역민, 지역언론, 지역기업을 싸잡아 눈 아래로 내리 본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부산시의 형편없는 문화 마인드도 중병이다. 시는 아니라고 발뺌하지만, 이번 사달의 바탕에 '다이빙 벨' 상영에 대한 괘씸죄가 작용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정부의 무능이 고스란히 드러난 세월호 참사현장의 모습을 그린 이 영화를 청와대나 친박계인 서병수 시장이 불편했을 거라는 건 안다. 그렇다고 영화 상영을 막으려 한 것은 유치하다. 그래도 결국 상영되지 않았느냐고 변명하지만 이후 전개된 상황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다이빙 벨' 같은 불편한 영화가 앞으로도 계속 영화제에 오를 거라는 거다. 그게 국제영화제가 가진 매력이고 장점이다. 그때마다 또 난리를 치고 감사를 하고 고발할 건가.

부산국제영화제는 생선이나 유제품, 운동기구 등을 전시 판매하는 시장이 아니다. 제7 예술로 불릴 만큼 종합예술인 영화라는 장르를 선보이는 축전이다. 이는 고도의 창작성과 예술성, 독립성과 자율성, 표현의 자유가 담보되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한 해 영화제 예산 중 절반가량을 부산시가 지원한다는 이유로 예산부문도 아닌 예술의 영역까지 파고 들어가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곤란하다.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몬트리올영화제 등 세계적인 영화제 역시 정부나 시의 사전 검열이나 간섭, 자기 검열이 있었다면 현재의 모습이 될 수는 없었다.

가만있었으면 영예롭게 이름을 남겼을 영화인 김동호의 인생이 마지막 고갯길을 맞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조직위원장 자리는 독배일 수도 있다. 그가 사는 길은 어쩌면 단순할 수도 있다. 눈치 보거나 좌고우면하지 않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사는 길보다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는 게 김동호가 가야 할 길이다. 오로지 부산국제영화제의 앞날만 생각하면서. 김동호의 흰 눈썹이 더 세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