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강원도 정선에서 특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폐광지역 좋은 마을 만들기 포럼'에 500여 명의 지역민이 모였다. 예정된 종료 시간보다 무려 4시간이 넘었음에도 거의 모든 지역민이 자리를 지켰다.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진정한 변화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 지역민들이었다. 15여년 전 카지노를 주 업종으로 하는 강원랜드가 탄생된 후, 이 회사가 지역에 내놓은 사회공헌기금이 무려 10조5000억 원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사북과 고한, 그리고 정선과 태백에 남은 것은 강원랜드에 대한 비난과 아우성뿐이다. 더욱이 두 도시의 길가에는 온통 모텔, 전당포, 마사지업소들이 판을 친다.
생존 문제와 미래 비전을 돈의 문제로만 치부했던 국가와 지역의 선택, 또 지난 15년 동안 지역발전을 돈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모두의 선택에 대한 반성이 앞선다. 카지노를 신산업으로 여겼던 짧았던 생각과 눈앞의 개별 이익에 급급해 저질렀던 탄광지역 문화와 정체성의 방치와 훼손은 결국 지역공동체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0조5000억 원은 분열과 파괴라는 상처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발표자들은 하나같이 지역에 후유증만 남기는 관광산업의 폐해, 과잉 중복투자의 폐해, 물질(돈) 의존적 지역 행태의 폐해 등을 지적하며 새로운 변화를 요청했다. 경청하며 의견을 개진했던 지역민들 또한 그 변화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자발적인 변화'였다. 그것도 '쇄신을 넘어 개혁 수준의 대변화'였다. 그들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변화 주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역을 움직여 가야할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것을.
심포지엄 현장에서 거제와 울산이 중첩되며 떠올랐다. 연일 언론에서는 조선업의 추락과 구조조정에 대한 기사들로 떠들썩하다. 조선업 3사의 총부채가 78조 원에 이르고 작년 손실만도 7조 원이라는데 지금까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한 정부와 방만경영으로 일관했던 기업들을 질타하는 기사들이 도배를 한다. 1980년대 말에 시작된 탄광업의 몰락과 2016년 조선업의 급락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석탄 생산에만 몰두하다 석탄의 생산가치가 떨어지자마자 전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결국 선택한 것이 카지노였는데, 그 폐해의 현장 앞에서 우리는 배만 만들다 조선업 전부를 잃어야 하는 그런 실수를 또다시 할 수는 없다.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사회의 고질병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연관 신산업들에 대한 중장기적 선 투자의 부족, 대기업 위주의 편중적 경제구조의 폐해들, 공공분야의 늦은 후회와 이에 대한 비난조의 비판들, 물질적 이익만을 위한 자기중심적 주장 등. 모든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보지 않는 현실중심적인 우리의 실상이고 또 혁신이 필요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작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DP가 2만7000달러 수준이라 한다. 수년 전부터 3만 달러를 넘지 못하고 비슷한 수준에 고착되어 있다. 왜 그럴까. 그동안의 발전 속도로만 보아서는 3만 달러 돌파는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었는데, 이젠 난공불락의 3만 달러가 되어버렸다. 지금 이대로의 '시대변화 읽기'와 '변화 대처방식'으로는 4만 달러는 물론 3만 달러도 제대로 넘을 수 없다. 또 아무런 변화 없이 3만 달러를 넘어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겐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대변화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근본적인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 출발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고 있는 부정적인 단면들을 걷어내는 일이 아닐까. 썩어 있는 환부는 그대로 둔 채 약만 바른다고 환부는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상들 중 단연 첫째는 '탈산업화시대와 맞지 않는 경제구조'다. 탈산업화시대와 대기업 중심의 단일 경제구조는 결코 조화되지 못한다. 차별화된 작은 경제단위들의 합이 대자본의 합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성숙된 사회구조와 환경이 구축될 수 있다. 정선과 태백을 가득 채웠던 광부들은 어디로 갔는가. 산업역군으로서 가졌던 그들의 호기와 열정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탄광인프라와 노동기술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기업을 또 하나의 대기업이나 대자본으로 대체하는 저급한 수준의 해결방식은 이젠 지양되어야 한다. 상생의 패러다임이 절실하다. 노동산업의 난제가 아닌, 지식산업으로서 조선연관기술의 확산과 관련된 도전의 기회로 인식할 수 있는 긴 호흡의 지혜가 이 순간에 절실해 보인다.
두 번째 환부는 '과거에 대한 배려와 미래 투자에 대한 부족'이다. 우리에게 과거는 늘 망각의 대상이다. 또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선택이 가져다 줄 후유증이나 악영향에 대한 고민도 매우 일천하다. 이런 현실중심적인 사고방식은 결국 역사성에 근거한 창조적 발상을 가로막거나 발생변수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지게 만든다. 결국 남는 것은 부실과 한순간 땜질뿐이다.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배려와 미래 변화에 대한 대비에 정성과 시간을 충분히 쓸 수 있어야 한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닐 것이다. 당장의 성과와 결과에만 돈을 쓰는 사회는 정말 불행한 사회다.
언급한 두 가지의 근본 원인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수직체계'로 종결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는 가치다원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관련된 의사결정구조 또한 급속도로 다변화되고 있다. 뒤떨어진 것을 알면서도 법대로 해야 하고 지배층(?)의 판단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관습이다. 경직된 법과 제도 자체의 모순과 문제는 외면한 채, 또한 좁고 급한 자기중심의 결정을 수정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난국타개의 키워드는 '유연성'과 '창조적 자유'뿐이다.
2016년! 우리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이 땅이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조선업의 비전에 뛰어들었던 그 청년들의 기개와 용기가 다시 거제와 울산에서 불같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걸맞은, 우리의 안과 겉 모두를 완전히 쇄신할 수 있는 철저한 대변화가 전제된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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