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역사는 친박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켜 한 시대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를 이끈 정파? 아니면 대통령을 결사옹위하는 것을 최선의 정치 신조로 삼고 주군과의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에 대해선 냉혹하게 찍어 낸 사당적 성격의 결사체?

친박처럼 한 사람의 성을 앞에 놓고 친한 정도를 기준으로 자의건 타의건 간에 정파가 나뉜 적은 정치적으로 극히 희귀한 사례다. 조선이 사색당파로 찢기고 갈라져 나라를 망쳤다고 하지만 친박의 종류에 비하면 양반이다. 2007년 원박(원조 친박)에서 시작해 지난 10년간 온갖 박이 명멸하고 부침했다. 박근혜라는 특정인을 원의 중심에 놓고 행성처럼 돌면서 거리의 짧고 긴데 따라 이런 박, 저런 박으로 패거리를 짓고 배척하기를 반복했다. 어떨 땐 죽고 못 살 듯이 하다가도 하루아침에 원수 보듯 했다. 여야 간 정적보다도 더했다.

그러던 친박이 총선 패배 후 새벽 안개처럼 홀연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는 게 정답이겠다. 20대 새누리당 국회의원 당선인 122명 가운데 친박계가 70명에 육박하는데도 그렇다. 4월 총선 전만 해도 진박 감별사까지 등장해 진박에 진진박까지 생겨 박근혜 마케팅을 그악스럽게 했던 그들이다. 여소야대에다 집권당이 원내 2당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친박이라고 해봐야 이득 될 게 없다는 약삭빠른 계산을 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는 바람보다 먼저 눕는 게 몸 보신하는 길이란 걸 잘 아는 그들이다. 오늘 새 원내대표를 뽑는데 경선에 나선 후보 누구도 박근혜를 팔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압권은 친박 유기준 의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면서 틈만 나면 대통령을 들먹이며 친박 실세 혹은 핵심임을 과시했던 그였다. 그는 "이제 친박이라는 말은 고어 사전에나 들어가야 한다"며 탈계파를 선언했다가 "탈계파가 친박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고 오락가락이다. 친박계 표는 얻고 싶고, 친박계라고 하자니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리 청와대와 친박 실세 최경환 의원이 "친박 대표가 아니다"며 경고를 보내봤자 누구보다 먼저 제 살길 찾아 나선 그의 귀에 이런 말이 들릴 리가 없다.

사실 유기준만 각자도생의 길에 나선 건 아니다. 친박 의원 대부분이 그렇다. 친박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더라도 임기가 끝나가는 박근혜 대통령 한 사람만 오매불망 추앙하며 줄을 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 칼럼 코너에서 총선 전에 적은 바 있다. 제 살길이 구만리인데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따라 같이 석양을 붉게 물들여 줄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그건 청와대 생각일 뿐이다.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 않던가.

친박계의 제정신 못 차리기도 한심하지만 대통령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지난달 언론사 편집·보도국장과의 청와대 간담회는 왜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와대는 행사 전 대통령이 여론을 듣고 소통한다고 했지만 무려 45명이나 되는 인원을 큰 방에 빙 둘러 앉혀놓고 어떻게 소통하고 민심을 들을 수 있는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대통령은 자기 할 말만 한 것 같았으며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변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한 것 외에는 없는 행사였다. 귀에 들어온 건 두 가지밖에 없었다. "4·13총선은 되는 일 없는 양당 체제를 3당 체제로 만들어 준 것이다." "사실 친박을 만든 적이 없다. 선거 때 자기들 마케팅으로 그냥 친박 탈박 짤박 같은 별별 이야기를 다 지어낸 것이다." 국민이 믿거나 말거나 간에 대통령만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국민이 듣고 싶었던 건 "모든 게 나의 부덕의 소치"라는 사과와 반성의 말 한마디 아니었을까.

대통령의 성정으로 봐서 남의 얘기를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말해야 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고 밥벌이하는 기자의 의무이겠다. 제발 친박계라도 해체하라. 대통령이 미련을 못 버리고 친박에 기대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려다 배가 침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경제 안보 민생 등 임기 말 대통령 책상 앞에 던져진 과제 중 만만한 건 하나도 없다.

여소야대에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건 협치밖에는 없다. 이런 판에 친박 70명 껴안고 가서 무얼 하겠는가. 그리고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친박이라고 무조건 "옳소"하고 따라갈 리도 만무하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결혼을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친박이라는 계파수장 자리에서 이젠 내려와야 한다. 필요하다면 탈당이라도 해서 여야 정파에 초연하게 국정에 임하는 게 임기 말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길이다. 박 대통령이 20대 국회에서도 일이 막히기만 하면 국회 핑계 대고, 야당 탓하고, 여소야대 때문이라고 비판할까봐 걱정이다. 그래봐야 나라만 만신창이가 될 뿐이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