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부주석이던 시절, 베이징의 한 행사장에서 장시간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있었다. 원탁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10미터쯤 떨어진 위치였지만 자리 배치상 정면이었고, 정확하게 1시간30분 동안 진행된 행사에서 시 주석이 자리를 비우지 않은 덕에 나도 꼼짝없이 자리를 지켰다. 한마디로, 내가 살아오며 처음으로 본 인간 돌부처였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퇴장하는 시간까지, 요즘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이는 예의 그 진중한 미소를 단 한순간도 흩트리지 않았다. 짧은 인사말을 하면서도, 케이크 커팅을 하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박수를 치면서도, 옆 자리 귀빈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정말이지 두려움에 소름이 끼쳤지만 탄성도 저절로 새나왔다. '과연 13억 인구의 지도자다!', '중국의 굴기가 이 지도자의 대(代)에 완성되겠구나!'

정치는 말(言)이다. 시진핑 주석은 대체로 말이 적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무겁다. 주석이라는 지위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이 무겁기에 그의 자리가 더욱 위엄 있고, 존중되어 일사분란하게 따르는 것 같다. 시 주석의 경제와 관련한 발언은 잦지 않다. 경제는 확실히 리커창 총리의 몫임을 말과 행보에서 알 수 있다. 중국식 집단지도체제의 특성상 전담 업무에 대한 확실한 나눔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간혹 시 주석이 경제에 대해 발언하면 다른 지도자들은 당장 자기 색깔을 감춘다.

자유로운 토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독재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확실한 목표와 방향 제시를 위해서는 때로 권위도 필요하다. 권위는 시시콜콜 지시와 간섭이 아니라, 지루한 논쟁이나 어느 정도의 혼란도 묵묵히 지켜보다가 정말 필요할 때 하는 적확한 지적과 방향 제시에서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 정치인의 말은 무거워야 한다. 더군다나 그 지위가 무겁다면 말도 그만큼이어야 한다.

한일 외교의 분기점을 '위안부 문제 해결'로 잡은 것은 애초 잘못된 설정이었다. 혹여 외교부 장관이 그 정점이었다면 그나마 여지가 있었다. 세계 12·13위 경제대국 운운하며, 그 역사적 인권의 문제에 기껏 100억여 원의 돈이 거론된 것도 볼썽사납지만 '불가역적'이라는 용어의 수용은 참담한 꼴이었다. 국내의 반발이 문제가 아니라 국격이 더 문제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이 외교부 장관으로 그치지 않게 된 것은 시작한 자리의 무게 때문이었다.

경제가 절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창조 경제'가 해법으로 제시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창조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말이 반복되니 앵무새의 복창은 있어도 구체적인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클러스터'니 무슨 벨트니 하는 말도 어렵다. 국민에게 제시하는 정치의 말은 쉽고 명확해야 한다.

이른바 '원샷법' 입법이 절실하다는 것도 공감한다. 그렇지만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국민서명에 동참하는 모양새는 너무 위험하다. 여지없는 배수의 진으로, 외통수로 몰아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자리는 아래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 말 한마디 또는 적절한 좌표 제시로 서로가 물러설 여지를 만들고, 타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행사장에서, 그 뒤로도 텔레비전을 통해 시진핑 주석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 차기 대통령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일단 체격에서 밀리지 않았으면 싶었다. 두 정상이 나란히 섰을 때 조금도 기울지(?) 않는 체격에, 시 주석의 미소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어도 우리 대통령의 미소는 밝아서 진실해 보일 때,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의 국격은 훨씬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난해한 고전의 인용으로 에두르는 지도자의 화법은 확실히 무겁다. 그러나 때로는 촌철살인의 유머로 웃음과 함께 메시지를 주는 재기(才氣)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우리의 경쟁력이기도 할 것이다.

'차기'를 꿈꾸는 이가 있다면 우선 말부터 정제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초조해 보이면 국민이 불안하다. 일일이 대응하고 날카로워서는 그릇의 크기도 작아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동안 가시적인 경제회복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임을 모두 안다. 국제경제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누구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국민의 시선이란 그런 것이다.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 주목을 받는 것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서는 억울하겠지만 국민에게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는 세계적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의 말을 소홀히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우리 경제의 활로가 거기에 있다는 귀띔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통일대박'이라는 훌륭한 비전은 어젠다에 멈춰 있다. 최소한 새누리당에서 '차기'를 꿈꾸는 이라면 당연히 그 비전을 잇고, 실천적 방안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무엇보다 올해 4·13총선을 앞두고 '진박' '비박' 운운하며 집안싸움을 하는 꼴은 실망을 넘어 염증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 하수에 무슨 일일이 대응인가. 큰 꿈을 가진 이라면 당내가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당당하게, 국정의 발목을 잡고 거친 말로 정치를 오염시키는 야당의 텃밭에 뛰어들어 일전을 겨루는 용기와 솔선수범도 필요하다. 그 지역구는 지역색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 따위는 떨쳐도 된다. 마땅한 적수가 없어서 비리와 막말을 일삼으면서도 주인 노릇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국민은 결코 좀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체구에 걸맞은 멋진 정치를 보고 싶다. 큰 비전과 실천방안을 내걸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움찔하지 않고 미소 짓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우리의 미래를 담고 싶다. 당내 역학, 입지, 세력 운운은 착각이다. 국민이 지지하면 세력 따위는 저절로 머리 숙이고 몰려들 텐데 무슨 속 좁은 염려인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