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더운 어느 여름날, 대구역을 통해 북성로를 찾았다. 북성로(약 1.4㎞)는 대구읍성의 북쪽 담에 해당하며, 6·25전쟁 후 기계공구점과 철물점이 모여들면서 지금의 길이 되었다. 기계부품과 공구, 철물이 주 거래품이다 보니 겉으로 전해지는 분위기는 분주하면서도 다소 거칠다. 길 중간쯤에서 '믹스카페 북성로'란 재밌는 이름을 가진 건물이 '훅~'하고 갑자기 다가온다. 1955년에 지었고, 1층은 철물점으로 2·3층은 다방과 당구장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던 여느 도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콘크리트조(3층) 건물이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했던 이곳이 대구의 예스러움과 새로움이 혼합된 '핫 플레이스'로 대변신 중이다. 마주 보는 사잇길로 '북성로 공구박물관'과 '아트숍 뜨락'이 보인다. 한 곳은 1910년대 적산가옥이었고 또 한 곳은 1950년대에 지어진 목조 창고다. 모두 대구 중구청의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 지원 사업'을 통해 재탄생된 근대 건축물들이다. 4년 동안 지원해 살려낸 곳이 무려 11곳이나 된다. 이들 때문에 먼지 날리며 쇠퇴하던 북성로에 생기가 다시 돌고, 공구가게와 철물점들이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대구 스타일의 지혜와 정성이 강하게 밀려왔다.
내친김에 11곳 모두를 찾아다녔다. 정말 가지각색이다. 박물관, 게스트하우스, 카페, 아트숍, 오피스. 심지어 완전히 반대 개념을 가진 '일본인 방문자센터'와 '일본 위안부 역사관'도 있다. 가장 특별했던 곳! '더 한옥&스파'라는 상호를 가진 게스트하우스. 이름부터 범상치 않았다. 골목 한편에서 만난 ㄷ자 모양의 한옥. 놀랍게도 10여 명의 청소년이 한옥 마당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뜨거운 대구 도심 뒷골목에서 수영을 한다." 문화충격이었다. 그 순간, 한참 동안 한옥 풀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더 놀라웠던 것은 한옥 풀장과 연결된 레스토랑이었다. 1950년대에 지은 쌀 창고를 개조했단다. 한옥과 풀장 그리고 쌀 창고. 분명 그날 나는 기운을 잃어가는 대구 뒷골목에서 샘솟는 신에너지를 느꼈다. 북성로에서 보낸 반나절은 비록 짧았지만, 근대의 발자국을 따라다닌 행복했던 시간 여행이었다. 근대의 공업기술이 미래의 신산업으로 연결되는 타임라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같은 시선으로 부산을 바라본다. 대구는 스스로 '근대특별시'라 부른다. 처음 들었을 땐 가당찮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부산은? 부산은 분명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근대역사도시'다. 개항, 6·25전쟁, 피란시대, 국가재건기를 차례로 거치며 형성된 부산의 근대 역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다양성과 특이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이 추진되었고, 감천문화마을이 명소로 자리 잡았다. 또 최근에는 피란수도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도 부산은 도시개발과 자본의 논리에 극도로 취약하다. 그 과정에서 힘없고 약한 근대의 물증들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동해남부선 동래역이 8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도로 개설 때문에 내년에 철거될 예정이라 한다. 도로 개설이 오랜 민원 대상이란 점에서 얼핏 이해는 된다. 하지만 해체 대상이 동래역이라는 점은 마음을 급하게 우울케 한다.
모든 근대건축물이 보존될 수는 없다. 운이 좋아야 하고 때를 잘 만나야 한다.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들, 특히 의식 있는 지도자와 공무원들을 만나야 한다. 2004년 영도다리 논쟁을 기억해 보자. 영도다리 때문에 지역 발전이 안 됐다는 궤변 속에서 영도다리를 무조건 헐어 넓고 큰 새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당시 주장들. 지금의 영도다리는 어떤가. 원래 영도다리와는 똑같진 않지만, 영도다리가 복원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점은 얼마나 큰가. 사실 그 혜택이 아직은 미약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 커질 것이다. 그때 영도다리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는 영도다리 마케팅과 자갈치와 영도 연안의 재생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갈등과 해체 위기에서 벗어난 후, 대박 난 근대역사환경들의 사례는 전 세계 곳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다시 동래역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로가 뚫려야 지역이 발전한다는 논리는 틀릴 수 있다. 또 그 도로는 다른 루트로 얼마든지 뚫을 수 있다. 동래역이 사라진다면 단순히 작고 오래된 간이역 한 곳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동래지역의 근대정신이 훼손되는 것이다. 항일민족운동과 학생의거의 현장이 사라지는 것이다. 근대 동래의 관문이 해체되는 것이다. 동래역 근처를 거닐었던, 또 동래역에서 기차를 탔던 동래고교와 동래일신여학교의 학생들을 떠올려 보자.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그 학생들이 매일 머물렀던 그 기차역이다. 혹 우장춘 박사도 동래역을 이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부산은 근대의 다양한 사건들과 장소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 특성은 우리나라 어느 도시보다 강하고 뚜렷하다. 그러므로 근대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결국 부산을 평범하게 또 퇴보시키는 지름길이다. 고도심 동래를 살리려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다. 물론 동래읍성이 주인공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고도심이 될 수 없을뿐더러 기대하는 발전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대구는 근대 역사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실오라기라도 잡을 기세다. 그래서 단지 1950년대의 것이라는 이유로, 도시 개발의 일반론으로는 당연히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쌀 창고들과 콘크리트 건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별히 많은 돈을 들이거나 대단한 재생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죽어가던 북성로가 다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동래역은 북성로의 근대 건축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다. 지켜야 한다. 보존해야 한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절대 손해가 아닐 것이다. 동래 아니 부산의 큰 미래를 잡는 일이다. 80년이나 된 기차역을 한 번의 저항도 없이 해체하는 도시가 어떻게 피란수도라 주창하며 또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겠는가.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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