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밤새 애인과 달콤한 밀어를 나눴습니다. 그는 혁명가이고 인권운동가이지만 까칠하지 않습니다.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남자입니다. '혁명'이 필요한 사회라도 '일단 웃고 나서'를 외치는 이 남정네 이야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그의 이야기 주제는 항상 무겁지만 지루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법을 사용하는 그의 어법이 마음에 듭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거리는 사이 어느새 그 문제점에 공감하고 성찰하게 되지요. 무엇보다 약자를 배려하며 불의에 두려움 없이 항거하는 이 남정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제 애인은 아주 까칠하고 나쁜 남자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그러나 자기실현을 위해 열정을 다해 사는 남자입니다. 이 나쁜 남자의 매력에 점점 빠져드는 저를 어쩔 수 없습니다. 치열하게 삶과 대적할 때만 자유도 영혼도 얻을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줍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 온 생애를 바쳐 몰두하는 그 정열이 아름답습니다. 열정을 다해 제 삶을 살아 본 기억이 없는 제게 이 나쁜 애인은 상당히 유혹적입니다.
그들을 오래전 제 애인과 비교해 봅니다. 그는 주위의 이목을 의식해 조잡하게 형성한 거짓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려있던 차에 제게 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습니다.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이상을 향해 앞만 보고 가는 이들 속에서 그 남정네는 빛을 발합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부르짖는 남자입니다. 차가운 가슴과 현학적인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거짓의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 막춤을 추며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호탕한 인물. 그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새롭습니다.
제 애인은 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와 어디에 있다가도 제가 부르면 당장 달려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취하고 사상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창에 희붐한 새벽이 진을 칠 때쯤 잠들곤 합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실. 사랑이 깊어지면 상대에 대한 욕망도 커지는 것이 사랑의 한계. 많은 사람이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사랑의 꽃을 지게 합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만나는 애인은 퍼내도 퍼내도 솟아나는 지혜와 기쁨을 주는 화수분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사냥감을 쫓다가도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는가를 살피는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우리 역시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영혼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10월은 인디언 말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는 달이랍니다. 우리에게도 맑은 정신을 가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해 보는, 타성에 젖고 흙먼지 뒤집어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내 영혼에게 내가 올 때까지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해 보는 그런 계절입니다.
오늘 저녁, 만날 애인은 시인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오늘 밤은 나타샤가 되어, 백기행(백석)의 애인이 되어 그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그가 자분자분 들려주는 시를 들으며 잃어버린 제 영혼을 찾고 싶습니다. 벌써 가슴이 설렙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돌아서면 허기질 맛없는 말의 성찬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또다시 남루한 일상을 시작하는 우리의 한 세상. 바람이 붑니다. 그 속에서 아픈 영혼들은 추억이 될 수 없는 상처들을 곱씹으며 가슴을 쓸고 있겠지요. 바야흐로 이브 몽탕의 '고엽'이 잘 어울리는 계절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태산 아래 박힌 바위처럼 변하지 않을 마음으로 스산한 가슴 보듬어 줄 애인을 당신은 몇 명이나 갖고 있습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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