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색은 초라하고 냄새는 고약하다. 눈을 돌리거나 잠시 숨을 멈춘다. 순간 무릎 위에는 듬성듬성 쓰인 글씨가 적힌 종이쪽지가 놓인다. 읽을 요량은 처음부터 없다. 가만히 빈 옆자리에 놓아버린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노인이거나, 사지가 멀쩡한 것처럼 보이는 사내이거나, 다리를 끌며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거나, 기능을 알 수 없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거나, 자기 믿음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며 회개를 외치거나,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철도가 주 교통수단인 나는 이런 난처함에 때로 어찌할 바를 몰라 불편하다. 가능하면 자리에 일어서 종이쪽지가 내 무릎에 놓이는 것을 피한다. 어느 날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넓은 한 남자가 종이쪽지를 돌린다. 예의 눈을 돌리고 책을 보는 데 열중한다. 그런데 내 무릎 위의 종이쪽지를 걷어가는 그의 손등과 슬리퍼를 끄는 발등으로 시선이 간다. 손등과 발등이 예사롭지 않게 퉁퉁 부어 있다. 그게 어떤 병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냥하는 일 말고는 어떤 일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보낸다. 호주머니를 뒤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가끔 동전 몇 개를 나이 든 동냥아치에게 내준 기억은 있어도 동정심을 표시한 적은 가물에 콩 나듯 하다.

오랫동안 내세워졌다가 얼마 전에 없어졌다. 부아가 나서 사무실로 찾아가서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시답잖게 여겨질 것 같아 마음을 거두었다. 실은 시답잖게 여겨질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나도 할 짓을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내 기억에는 '쾌적한 승차 질서를 위해 상품을 사거나 구걸인에게 돈을 주지 맙시다'라는 내용의 홍보 배너를 개찰구 앞에 세워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린지를 몰랐다. 느닷없고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서 있기도 하거니와 공공기관에서 이런 홍보문을 보란 듯이 내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시철도 객차 안에서 구걸하는 이들의 행색이나 냄새는 불쾌하다. 그러나 안타까움 또한 없지 않다. 여전히 구걸해야만 하는 우리 이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말라는 홍보문을 개찰구 앞에다 내걸어야 할 정도인가. 그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부채이지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일은 아니다. 마치 그들이 파렴치한 사람인 듯 이 홍보문을 공공장소에 내걸 수 있다니. 도시철도를 교통수단으로 삼는 나에게서 그 홍보문은 구걸 행각을 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낯 뜨거움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맙시다'. 쾌적한 승차감을 위한다는 이 홍보문은 부끄러움 모르는 집단 이기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안쓰러운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쾌적한 승차감과 교통질서를 위해,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가능한 선의, 혹은 최소한의 개인적 동정심마저 금지하는 명령이다. 편의 때문에 동정심은 마치 교통질서를 위배하거나 잘못된 행위가 된다.

이 홍보문대로라면 그들을 하차시키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해야 할 임무는 부산교통공사에 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승객에게 넘겨버린다.

이들의 구걸이 개인의 무능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일까. 그런 현실을 피해가기만 하는 공공기관을 보면서, 이들의 행각이 우리의 사회적 부채라고 생각한 적은 있을까. '사회적 부채'를 '사회적 적대'로 역전시키는 이 전략을 구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젊은이들이 직장을 못 구해 낙망하고 늙은이는 사회적 위상에 허덕이고 과잉소비와 만연된 빈곤이 모두 그들 자신의 무능함에 기인한 것일까. 나누기보다 독식하려는 것에서 온 현상은 아닐까.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밀려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을 스스로 만들고 자신의 어려움을 효율성의 이름으로 내치는 기업들이 그렇지 않은가.

개인뿐 아니라 기업, 공공기관까지 이윤을 극대화하기만 바라는 이 현상에 대한 어떤 되돌아봄은 없는 것일까. 이런 사회적 상황은 오늘날 정부와 공공기관의 기능을 다시 묻게 하지 않는가. 상품을 관리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서비스를 개선하려는 이들 공공기관의 노력은 공공적 윤리 위에 가능한 것이다. 그저 성과주의에 급급할 뿐이라면 인간의 온전한 삶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기업화한 공공기관이 이 시대를 거울처럼 비춰주지만, 그에 대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윤이 남지 않는 공공기관의 운영이야말로 그에 대응할 사회적 요청이 아닌가. 진작 개인적으로나마 이 팻말을 철거하라고 요구하지 못한 나 자신은 오늘 또 도시철도를 이용한다. '부채'를 '적대'로 만든 그 팻말은 오래 있다가 어느새 없어졌다. 그래서 다행인가?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