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부화(花復花)'. 영의정 채제공이 죽은 뒤 정조가 과거 문제를 이렇게 냈다. 고전 어디에도 없는 문구. 당연히 다들 답을 못했는데 단 한 사람만 답을 냈다. 정조가 연유를 물었다. 그 선비는 산속에서 노인을 만나 하룻밤을 유숙했으며 그가 이 말을 해 주었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았더니 영의정 채제공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대동기문'에 실린 야화인데 '조선의 정승'이란 책에서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화부화는 '꽃이 핀 자리에 다시 꽃이 핀다'는 뜻. 구체적으로는 목화를 이른다. 목화 꽃이 지고 나면 하얀 솜꽃이 다시 피니 맞춤한 표현이다. 정조가 이 문제를 낸 것은 세종 대에 활짝 핀 문화가 영·정조에 다시 핌을 상징한다.
목화의 꽃말은 '어머니의 마음'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색깔이 애잔하다. 노랑이나 분홍인데 투명할 정도로 옅다. 대신 그 자리에 돋아난 새하얀 솜꽃은 훨씬 강렬하다. 자신을 숨기고 자식을 드러내니 꽃말이 제격이다. 그 솜으로 백성을 보호하니 이보다 나은 모성애가 또 있을까.
물론 화부화는 목화만이 아니다. 민들레도 어금버금이다. 희고, 노란 꽃이 지고 나면 민들레 홀씨가 맺힌다. 그 모양새가 하얀 꽃처럼 보인다. 색깔이 흰 것도 목화를 닮았다. 천년초라든가, 블루베리라든가 하는 것들은 열매가 꽃처럼 생겼다. 하니, 화부화라 해도 틀림이 없다.
화부화라…. 실질적인 자연의 현상에 강한 의지를 실었으니 참으로 멋들어진 표현이다. 옛 이야기를 빌려온 건 그게 오늘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란 빨간 꽃이 지고 박근혜란 꽃이 피었다. 빨강은 에너지가 타오르는 색깔. 경제가 타오르고, 민주화가 타오르고,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는 솜꽃이 필 차례인데, 그게 그렇게 쉽지를 않다. 화부화의 조건이 잘 안 맞기 때문이다. 세종이 문화를 꽃피운 건 태종이 있어 가능했다. 피의 숙청을 통한 왕권 강화가 부흥의 발판이었으니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세종은 다져놓은 대로를 시원하게 달렸다.
영·정조에 이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당시는 당쟁 때문에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 어찌 보면 계파 분열이 극단에 이른 오늘의 우리 정치 풍토와 상당히 닮았다. 그런 속에 문화의 부흥기를 구가했으니 참고할 바가 적지 않다. 해법은 단 하나였다. 탕평책. 힘의 쏠림을 견제하고 두루 인재를 등용했다. 왕은 원 밖에 나와 당파로 당파를 제어했다. 또 다른 해법은 명재상. 황희, 채제공이 그들로 통합의 리더십을 보인 사람들이다.
이리 놓고 보면 해법은 분명히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화부화이긴 한데, 그 색깔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흰색은 에너지 발산이 극에 달한 색깔이고, 검은색은 에너지가 다 타버린 색깔이다. 어떤 걸 선택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 우선은 당쟁의 원 밖으로 나와야 한다. 대통령이 당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화부화는 꿈에 불과하다.
국회법 파동과 유승민 갈등은 꽃을 피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조용히, 절차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닦달할 일도 아니다. 여야는 물론 여당 의원들이 합의해 이룬 결과가 아닌가. 원내대표를 질타해 당내 갈등을 심화시키는 건 부메랑일 뿐이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씨앗은 과육을 먹고 싹을 틔운다. 새 생명이란 희생을 딛고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정치에 새 살이 돋으려면 당연히 과거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아예 싹을 꺾어버리면 생명은 지속되지 못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순천 여사. 둘의 관계는 참조할 가치가 있다. 남과 여, 대통령과 야당 당수, 대구와 부산이라는 대척점에 있었다. 한일 국교수립을 비롯해 굽이마다 협조를 이끌어냈다. 누님, 누님 하면서 말이다. 그런 상호 이해의 폭이 없었다면, 아마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야당이라고 마냥 싸울 일도 아니다. 친구는 더 친해 봐야 덕이 없다. 하나, 적을 내 편으로 돌리면 이익은 배가 된다. 전쟁을 한 원수도 대화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정치를 함께하는 동업자인 바에야 어찌 하겠는가. 자주 만나 마음을 나누면 매사가 원활해 진다. 대화는 언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
강물은 굽이굽이 흘러야 천리를 간다. 굽이는 정화와 생명의 모태. 물이 굽이치는 곳에 모래가 쌓여 물을 맑게 하고, 맑은 물은 생명을 키우는 것이다. 구절양장 꼬인 물길을 곧게 펴면 생명이 그친 죽음의 강이 된다. 정치라고 뭐 다를까. 반목과 갈등의 굽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얼마나 유연하게 넘길 수 있느냐는 선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쓸모 없는 듯한 게 쓰임이 있다는 뜻이다. 마음을 거스르는 게 오히려 효자일 수 있다. 보기 흉하다 내칠 게 아니고, 입에 쓰다고 내뱉을 게 아니다. 화부화의 하얀 꽃은 그런 포용 속에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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