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과 격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고랑과 이랑으로 갈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민중 사이에 회자되면서, 삶의 지혜를 압축시킨 고랑 말이 속담이다. 단문 형식, 촌철살인의 해학과 풍자, 웃음과 꾸지람을 통한 가르침이다. 구비 전승되어 온 공동의 지혜이기도 하다. 양반은 입에 담기조차 낭패한 말, 욕설과 비어 속어와 은어까지 거침없이 구사된다. 식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화법이 아니다. 말한 이가 드러난 속담은 이미 속담이 아니다.

격언은 고랑의 물과 거름으로 자라고 피어난, 이랑 말이다. 유식하고 고상하다. 격조도 있다. 그래서 격언이다. 비속어 따위가 들어설 자리, 없다. 은유적이고 지적이면서 기록한 분이 명시된다. 격언이 주인을 잃으면 현학적 속담으로 변신한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바뀌면 맞지 않는 말, 그릇된 가르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시대를 뛰어넘은 석학과 스승의 말조차 요즘 안목이나 가치관으로는 아닌 것이 보일 정도니 알조 아닌가.

연속성과 진정성은 속담 차지다. 시대가 변해도 바래지 않는다. 더욱 절실해진다. 처연하기까지 하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란 속담 그대로 외형은 볼품없어도 내용과 효용가치는 최고다. 천학비재인 죄로 외국의 사례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속담이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나라가 있을까, 자문해 본다.

겨우 찾아낸 이유 두 가지다. 첫째, 상대를 물리적으로 제압할 힘이 부족하다. 힘이 모자라니 배짱도 용기도 없다. 결투가 딴 나라 문화인 이유다. 실실 웃으면서 상대방의 급소를 찔러대는 대륙적 잔인성도 없다. 남는 것은 면종복배와 구밀복검, 아첨과 모함, 빙빙 돌려 말하기다. 논리적 진술에 취약한 국민인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의견만 달라도 적으로 간주하는 감성 과잉, 혈연 지연 학연을 당연시하는 편 가르기와 패거리문화 속에 이성과 논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용기와 설득력 부재의 극복과 반전이 속담이다. 속담을 통하여 진솔하면서도 살갑고 해학과 풍자 그득한 국민이 되고, 특유의 국민성이 형성되었으니 전화위복이다. 인생세간에 전적으로 좋고, 나쁨이 없음을 증명한다. 속담 많은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속담 중 국민성의 양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도적맞고 죄 많다'와 '맞은 놈이 죄인이다'일 것이다. 도적맞고 죄 많다. 제 것 잃어버리고 남을 의심하다 보면 애먼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 있으니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멋대로 사람을 재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질고 조심스러운 국민이었음을 응변으로 보여준다. 영원히 살아남아야 할 가르침이다. 한참 기뻐하다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맞은 놈이 죄인이다. 맞은 놈, 피해자고 약자다. 도적을 맞든, 강도를 당하든, 직사하게 얻어터지든 힘없는 이는 입 다물라는 말이다. 소름이 끼친다. 약자는 축생이니까 사육사인 강자에게 대들지 말라는 뜻이다. 도적맞아도 소란 떨지 말고, 강도를 당해도 동네방네 외고 다니지 말고, 맞아도 비명 지르지 말라는 공갈이다. 까불다가 다친다는 협박이다. 절대로 가르침이 아니다. 같은 나라 사람의 생각이 이 정도로 다를 수 있을까? 속담이 불변이란 말 자체가 허언인가? 의문은 금방 풀린다.

도적맞고 죄 많다. 양반(兩班)에 의해 상것으로 능멸당한 보통사람, 상민(常民)의 속내다. 타의로 '상것'으로 전락한 상민이 '상놈'이라 자조한 것이 상민의 변천사다. 말의 역사다.

양반의 개구일성이다. 점잖은 중저음이다. "상것이 감히 양반도 오르지 못하는 자리를!" 타의에 의해 낮아지고 스스로 자조하다가 욕설이 되어버린 상놈의 속담 '양반은 글 덕 상놈은 발 덕', 아리다가 슬프다. 선량함만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이다.

맞은 놈이 죄인이다. 가진 분이 가지지 못한 이를 선무하는 척 위협하고 있다. 속담이라 이름 붙여지기 전에 사라져야 할 폭언에 언어폭력이다. 강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더없는 잔인함, 카더라 방송으로 일관하는 비겁함, 칭찬을 가장한 험담의 표리부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도적맞고 죄 많다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속담임에 비해, 맞은 놈이 죄인이다가 득세한 것은 반세기도 되지 않는다니 만분다행이다.

문제는 이랑 고랑에 다 있다. 단시간에 이루어낸 경제대국, 대단한 나라다. 그러나 물질적 가시적 풍요를 위하여 정신의 풍요를 포기한 인성교육, 부의 축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릴 필요 없고 돈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식의 천민자본주의, 균제와 균형은 몰론 인간성까지 허물어져 내리는 현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랑하는 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 부산이 왜 이러냐 싶기도 하다가 사십 년 현장교사에 교단작가임을 자임하면서 금정산 자락에서 살고 있는 필자 또한 공동정범이라 생각하니 모골송연, 부끄러움 더불어 하염없이 작아진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