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갱'이라는 말이 나돈다. '호구 고객(갱)님'을 줄인 것이다. 이달부터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이 시행되면서 나온 신조어다. 단말기와 요금을 제값대로 다 주는 '봉' 같은 소비자를 말한다. 호구 같은 손님은 예전에도 있었다. 새삼 화제가 되는 것은 법 시행으로 일부가 아닌 전체 고객이 호갱이 됐기 때문이다.

호갱은 단말기 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지자체도 국가에게는 더없는 호갱이다.

지난 9일 강원도 삼척시가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정부가 2012년 9월 삼척시 근덕면을 신규 원전 예정지로 고시한 데 대한 뒤늦은 찬반투표다. 2만8867명이 투표에 참가해 85%인 2만4531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데 정부는 이 주민투표가 무효라고 한다. 원전의 유치신청 철회는 국가사무여서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라는 존재는 참으로 편리하다. 국가사무라는 방패를 앞세워 지자체와 주민들의 압도적 의사를 간단하게 차단한다. 사실 원전 예정지 결정이나 철회가 국가사무인지부터가 의심스럽다. 특정 후보지역의 문제라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원전 후보지역의 수용성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복합적 성격의 원전 예정지 결정과 철회를 국가사무라며 지자체의 관여를 거부하는 정부가 정작 국가사무인 무상보육이나 기초연금은 왜 그렇게 손쉽게 지자체에 떠넘기는지. 무상보육이나 기초연금은 거주지와 상관없이 영·유아 혹은 65세 이상 노인이라면 대상이 되는 전국 공통업무이지 않은가. 또 신공항과 같은 국가사무는 어떻게 해서 5개 시·도 합의를 요구하는 등 지자체의 의견을 깍듯이 존중하는지. 국가사무 절차를 밟아 후보지를 결정해버리면 되지 않는가.

복지사업이나 누리사업도 마찬가지다. 국가사무를 지자체에 떠넘기면서 정작 지자체와는 아무런 상의가 없다. 누리과정 어린이집 예산의 경우 지자체가 예산난을 호소하자 기획재정부는 지방채를 발행하면 된다고 했다. 지자체 부채가 너무 많다며 '지자체 파산제' 도입까지 거론하는 정부가 제 편하자고 지자체에 빚을 권한다.

최근의 담뱃값 인상안에도 정부가 지자체를 호갱으로 보는 구석이 숨어 있다. 세인의 관심은 갑당 4500원으로 평균 2000원이나 올리는 것이 증세가 아니냐는 데 있다. 그런데 국회에 제출된 담뱃값 인상안을 보면 담뱃값에 포함된 지방세 비중은 현재의 62.1%에서 43.7%로 도리어 낮아진다. 국세인 개별소비세(갑당 594원)를 신설하는 등 국세 위주로 인상안을 짰기 때문이다.

지방세 수입을 한 푼이라도 늘리기 위한 지자체들의 몸부림은 눈물겹다. 공무원이 출장을 갈 때도 자기 고장에서 담배를 미리 많이 사가지고 간다. 담배 한 갑의 지방세라도 보태자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라는 이는 이처럼 아예 윗선에서 뭉텅 잘라간다.

일본의 극우보수 정치가 이시하라 신타로가 소니그룹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 함께 '노(NO)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펴낸 것이 1989년의 일이다. 양키 콤플렉스의 일본사회가 미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NO'라고 말하기까지 1945년 패전 이후 무려 44년이 걸렸다. 일본이 더는 미국의 '호갱'이 아니라는 이시하라의 외침은 일본인에게는 금기의 해제이자 카타르시스였다.

우리는 올해가 지자체(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원년인 것 같다. 삼척시 선관위는 원전 예정지 철회가 국가사무라며 주민투표 업무를 맡기를 거부했다. 예전 같았다면 주민투표도 흐지부지 됐을 터이다.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투개표 절차를 진행했다. 삼척시와 시민들이 중앙정부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크레인 브린튼은 '혁명의 해부'에서 영국 청교도혁명, 프랑스혁명, 미국 독립혁명, 러시아혁명 등 성공한 4개 혁명을 분석했다. 이들 혁명의 진전 과정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와 대중의 불만, 지식인의 이반, 지배수단의 마비, 통치조직 내부의 분열이었다.

국가사업 전가에 의한 지자체 재정 위기 심화와 지자체의 불만은 이미 시작됐다. 삼척시민들의 자체 선관위 구성과 주민투표 실시는 민심 이반의 극단적 표출이다. 기초단체장이나 교육감들이 지자체 재정 '디폴트(지급불능)'와 '어린이집 보육료 예산 편성 거부'를 선언한 것도 동일하다. 다음 과정은 공권력의 마비다. 삼척의 경우 원전 후보지에 관한 한 국가권력은 준마비상태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를 너무 만만히 봤다. 우리 지방자치제는 기초의회와 광역의회가 구성된 1991년부터 따지자면 스물네 살의 청년이다. 더 이상의 어린애 취급은 사양하고도 남을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