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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가체(加체) /신명호

호화 혼수 폐단 오늘날의 결혼, 정조의 가체금지 타산지석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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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10-10 20:05:15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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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加)는 고려 때 몽고에서 들어온 부인의 머리 양식이었다. 다리라고 불리는 가체는 덧머리 즉 가발이었다. 1백년 가까운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 가체는 궁중 혼인에서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의 경우 왕비가 확정되면 왕은 왕비를 상징하는 복장인 명복(命服)과 머리 장식인 수식(首飾)을 마련해 주었다. 왕비 수식의 핵심은 가체와 가체를 고정시키기 위한 각종 비녀 및 장식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왕비의 수식은 양반층을 비롯한 전 백성들에게 퍼져 나가 수많은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처음에는 혼수품의 하나에 불과했던 가체가 점차 가문의 부와 힘을 과시하는 사치품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왕실의 혼인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가의 혼인에서도 가체는 신랑 쪽에서 신부 쪽에 마련해 주어야 했다. 신랑 쪽은 자신의 부와 힘을 과시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된 가체를 마련했다. 이것이 가문 사이의 경쟁을 불러왔고 그럴수록 가체는 더욱더 화려해졌다. 조선후기의 경우, 옥이나 비취 등으로 장식된 가체를 마련하는 데 보통 60~70냥의 비용이 들었다. 비싼 경우는 수백 냥이 들기도 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3냥 정도였으므로 60~70냥 정도의 가체를 마련하려면 20여 가마의 쌀이 필요했고, 수백 냥짜리 가체라면 수백 가마의 쌀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양반이라고 해도 가체 하나에 수백 냥의 비용을 쓸 수 있는 가문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들은 빚을 내서라도 값비싼 가체를 마련하고자 했다. 만약 가체를 마련하지 못하면 약혼 상태로 몇 년씩 기다리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는 기다리다가 파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양반층 사이에 퍼진 가체 문화가 농민들에게 확산되면서 비용 때문에 노총각, 노처녀로 늙어가는 농민들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왕이 영조와 정조였다.

영조는 가체 때문에 혼인하지 못하는 노처녀, 노총각 문제를 해결하고자 왕실에서부터 근검, 절약을 솔선하였다. 나아가 호혼(互婚)이라는 법을 시행하였고 양반 부녀자의 가체를 금지하고 대신 족두리를 이용하게 하였다. 영조가 시행한 호혼이란 양인과 천인이 혼인했을 때 그 자녀를 양인으로 인정해주는 법이었다. 본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에 한 명만 천인이면 그 자녀는 천인으로 간주했다. 이런 상황이므로 호혼이라는 법이 시행되면 양인과 천인 사이의 혼인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와 함께 영조는 양반 부녀자의 가체를 금지시킴으로써 혼인과 관련된 과소비 풍조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가 시행한 호혼이나 가체 금지는 양반층의 기득권을 크게 해치는 조치였다. 예컨대 호혼이 아니라면 양반 소유의 노비가 양인과 혼인해 출산하는 자녀는 천인이 됨으로써 양반의 노비가 되지만 호혼이 시행되면 그럴 수 없었다. 아울러 양반 부녀자가 가체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양반과 농민의 혼인에서 구별이 미약해졌다. 이에 따라 영조대의 양반들은 호혼과 가체 금지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결국 호혼과 가체 금지는 취소되었다. 정조는 즉위한 후, 영조의 50년에 걸친 치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감필(減疋), 준천(濬川), 금주(禁酒), 호혼(互婚), 거체(去)였다. 감필은 영조대의 이른바 균역법이었고, 준천은 청계천 준설공사였다. 이 둘은 영조 대 내내 시행되었지만 금주, 호혼, 거체는 양반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금주, 호혼, 거체를 영조대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인정한 정조는 이 중에서 거체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자 가체 금지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이 결과 정조 대에 가체로 인한 과소비 풍조가 상당부분 개선되었으며 노총각, 노처녀 문제 역시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

오늘날 혼수 문제로 야기되는 사회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조선시대의 가체 문제를 닮아 있다. 상류층의 과시와 경쟁이 그렇고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는 폐단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영조의 솔선수범, 호혼, 가체 금지 그리고 정조의 가체 금지는 오늘날의 혼수 문제에 관한 역사의 타산지석이라 할 만하다.

부경대 교수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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