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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불모의 인문학 /이택광

한국 사회 내부의 자기성찰 담론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척박한 학문 구조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8-22 19:35:08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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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생력부터 키워야

한국에서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 다시 돌아봐도 그 사정은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문한국'(HK)이니 뭐니 소란스럽긴 했지만, 과연 한국의 상황에 적절한 인문학의 자생성이 만들어졌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시장에서 인문학은 약진 중인 것처럼 보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다양한 인문학 서적들이 대중의 관심을 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만히 사정을 뜯어보면, 막연하게 인문학이 시장에서 인기 있다고 말하기 민망한 현실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인문학의 인기가 주로 '고전'이나 외국의 저작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인문학을 교양으로 소비하는 것은 인문학 본연의 의미와 관계가 없다. 인문학의 문제의식은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힐링'이라는 개념은 겉으로 보기에 인문학적인 문제의식을 내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힐링이라는 해결책으로 치환시킨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주체는 치유될 수 없다. 주체성 자체가 불안이라는 조건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불안이 곧 주체성의 핵심인 것이다. 주체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발상이 인문학과 별반 관계가 없는 셈이다. 인문학은 힐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유이다. 힐링에 실패한 이들이 인문학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힐링이라는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문학의 문제의식을 전유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인문학의 인기는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특히 이런 구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내 인문학 저술가 또는 학자의 저작에 대한 무관심이다. 개론서나 소개서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정말 한국의 현실에 육박해가는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 서적들은 독자의 관심밖에 놓여 있다.

한국의 인문학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기보다 '누가'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네임드'가 쓰면 반응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당연히 이런 처지에서 출판사들은 '좋은 내용'을 기획하는 것보다, 이미 시장성을 가지게 된 '네임드'를 찾아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훨씬 수익구조상 나은 일이다. 이러니 기획력이 뛰어난 편집자보다 섭외력이 뛰어난 편집자가 더 훌륭한 성과를 거두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증상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자기 성찰의 담론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 이공계열은 물론 인문계열조차 외국대학의 학위를 받아오지 않으면 기성제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현실은 자생적 학문의 구조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막아놓고 있는 장애이다. 자신이 지도하고 수여한 대학원생의 학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고약한 상황은 단순하게 '사대주의'라는 말로 해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학문의 수준을 높이고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대학제도를 개선하는 것보다, 이른바 선진국의 교육제도를 이용해서 '간편하게'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 여전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선진국 교육'에 대한 열망과 어우러져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지금 목격하고 있는 이런 불모의 인문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외국 학문을 배척하고 토종 학문을 장려해야한다는 국수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정립하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시장 논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장 논리가 인문학을 주도하는 상황은 학문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하겠다. 외국처럼 전문연구가와 대중을 이어주는 수많은 '중간작가'를 배출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져야할 것 같다. 어디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실현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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