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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무정설법 /이성희

제주도 구럼비, 천성산 도롱뇽…유정물도 무정물도 생명의 동포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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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2-03-28 19:55:44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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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의 대문호 소동파는 여산 동림사의 동림상총 선사를 참배하고 바위나 산천초목도 부처와 같은 설법을 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화두를 받았다. 그는 귀로에 여산 폭포를 지나다가 폭포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홀연히 화두를 깨닫고 오도송을 지었다. 그 오도송이 '계성산색(溪聲山色)'이라고 불리는 시이다. '계곡물 소리가 그대로 부처의 설법이요./산색이 그대로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팔만 사천 법문의 소식을/뒷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까?' 소동파가 들은 소식을 우리도 들을 수 있을까?

선거판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사이에 구럼비의 소식이 잘 들리지 않는다. 얼핏 들리는 소식에는 해군이 제주도의 요청에 따라 시뮬레이션 결과를 검증하는 기간 동안 일부 공사를 중단하겠지만 구럼비 발파는 계속 강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해군기지의 설치와 자연의 보존,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가 하는 판단은 분명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마 우리는 비용 편익 분석을 통해 냉정하게 공리적 평가를 내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구럼비가 보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논쟁할 생각은 없다. 다만 구럼비를 보존하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의 어법을 살펴보면 상당히 이채롭다. "구럼비를 살려주세요" "구럼비를 죽이지 마라" "울지마 구럼비야" 등등. 이런 말들에 나타난 구럼비는 분명 그저 바위덩어리인 무정물(無情物)이 아니다. 반면 공사 강행을 주장하는 측에서 드는 과거의 예가 하나 있는데 그 예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 그들은 그 과거의 사건이 지금 공사를 정당화해 줄 적절한 사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지난 2003년 지율 스님이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가 천성산 일대 늪지를 파손하고 거기에 서식하는 도롱뇽이 서식지를 잃게 된다고 주장하며 도롱뇽을 원고로 공사 금지 가처분 소송을 낸 일이 있다. 일명 '도롱뇽 소송'이다. 2006년 대법원은 이 소송을 각하시켰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의 연결이 내게는 무척 흥미롭다.

우선 '도롱뇽 소송'이 가진 중요한 함의는 도롱뇽과 같은 미물도 법률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그 법률적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 아니 이 지구에 법률적 권리를 가진 것은 오직 인간만일까? 홉스에 의해 제기되고 이후 서양 근대 사회의 기초 개념이 되는 '사회계약론'은 자연과 사회의 분리 위에서 착상되었다. 그 착상에 근대법, 그리고 우리의 법이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은 우리가 당면한 총체적인 생명의 위기에 대해 결코 바람직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전 지구적인 오염과 파괴, 기후 변화, 유(類)와 종을 넘나드는 기이한 괴질들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의미 있는 판단을 하기에 우리 법의 철학적 기초는 너무나 협소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는 사회의 법률과 자연의 법칙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계약'이 아니라 '자연계약'을 새롭게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세르의 '자연계약'도 그 발상이 너무 서구적이다. 소동파라면, 산색이 그대로 청정법신이라고 하는 소동파의 무정설법 식이라면, 무정물도 유정물과 다르지 않은 거룩한 생명이다. 이들과의 관계는 계약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이미 우리와 한 탯줄로 이어진 생명의 동포들인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새들과 우정을 나누었으며, 신라의 별들은 화랑들을 위해 길을 쓸어주며 서로 사귀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이제 우리가 그 사회적 가치의 계산 이전에, 한 마리의 도롱뇽, 한 개의 바위의 작은 아픔에 대해서 귀를 닫을 때, 우리는 무정설법에 귀를 닫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생명의 감각이 점차 마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비의 끝은 죽음이다. 창공의 별들에서부터, 작은 도롱뇽, 그리고 무정한 바위 하나가 내는 비명이 우리의 비명과 이어져 있고, 저들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와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우리 시대의 무정설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다.

구럼비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아내에게 등 떠밀려 들어간 절집에서 함께 독송한 발원문 마지막 구절이 사무친다. '기는 벌레, 섰는 바위 함께 성불하여지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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