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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유배지에서 탄생한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 /신명호

사화에 두번 연루, 시련 겪은 이문건… 유배지에서 손자 성장 기록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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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3-03 20:49:07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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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건은 16세기의 양반이었다. 이문건은 조선초기의 명문가인 성주 이씨 출신이었다. 이문건은 사림파의 영수로 명성이 자자하던 정암 조광조에게서 수학해 19살에 소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곧바로 거친 시련이 이문건의 앞길을 막았다. 25살 되던 해에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그해에 이른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 사림들은 역모로 몰려 죽거나 유배당했다. 조광조의 제자인 이문건 역시 9년간 과거응시 금지라는 처벌을 받았다. 이문건은 첫 번째 시련을 잘 이겨냈다. 과거응시 금지가 풀리던 34세에 보란 듯이 대과에 합격했다. 그때는 정치상황도 확 바뀌어 있었다. 역적으로 몰렸던 조광조 등 기묘 사림들이 복권되어 사림 세력이 다시 힘을 얻는 상황이었다. 대과에 합격한 이문건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다가 이문건은 52세 되던 해에 결정적인 시련을 맞았다. 그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윤원형 등 소윤이 윤임 등 대윤을 제거하려 일으킨 정변이 이른바 을사사화였다. 불운하게도 윤임의 사위 이덕응과 가장 친한 친구가 이문건의 장조카 이휘였다. 역적으로 몰린 이휘는 극형을 받았다. 가문은 연좌되어 쑥대밭이 되었다. 당시 승지였던 이문건 역시 연좌되어 성주로 귀양 가게 되었다. 먼저 귀양지로 갔던 이문건은 몇 년 후 처자식들을 전부 성주로 불러들였다. 이문건은 부인 안동 김씨와의 사이에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두었다. 을사사화 이후 아들 내외가 안동 김씨를 모시고 있었는데, 이들을 전부 성주로 오게 했다.

이문건의 하나뿐인 아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6~7살 때만 해도 영리했는데 열병을 앓고 난 후 정신지체아가 되었다. 유배지에서 일곱 식구의 생계는 여전히 이문건의 책임이었다. 재산 증식과 함께 이문건이 가장 신경 쓴 것은 가문의 장래였다. 하나뿐인 아들이 정상이 아니기에 아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아들 내외가 성주로 오던 때만 해도 손녀 3명만 있었을 뿐 손자가 없었다. 이문건은 옥황상제에게 "저는 외롭고 위태로우며 돕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거꾸러지면 그 누가 부축해 주겠습니까? 저에게 어리석고 병든 아들이 있습니다. 가문을 계승할 손자를 허락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쓰기도 했다.

58세 되던 해에 이문건은 그토록 바라던 손자를 보았다. 성주에 귀양 온 지 6년 만이었다. 이문건은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손자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조선시대 양반으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양아록이라고 하는 한시 문체의 육아일기를 썼다. 양아록은 손자가 태어난 해부터 시작해서 16살 되던 해 이문건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장 16년 동안을 썼다. 이문건은 손자가 태어나던 때의 감격부터 처음 일어나 앉은 모습, 첫 이가 났을 때의 모습, 처음 일어나 걷던 모습, 돌잡히기, 유치를 갈 때의 모습 등등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 모습들을 기록하였다.
이문건은 손자가 너무나 귀중하기는 했지만 교육을 시킬 때는 무섭게 했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거나 꾀를 피울 때는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양아록에는 회초리를 맞고 우는 손자의 모습에 속울음을 삼키던 이문건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손자 아이를 불러 무섭게 꾸짖고/손까지 들게 하여 엄준함을 보였다/회초리를 찾아 세차게 종아리 치니/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10여 대를 치고 차마 더는 못하고/잘못하면 또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만 물러가라 하자 엎드려 오래도록 우는데/늙은이의 마음에도 울음이 나려 했다."

이문건은 23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74살의 나이로 성주에서 삶을 마감했다. 제2의 인생을 귀양살이로 보낸 셈이었다. 그 오랜 귀양살이 동안 이문건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귀양지에서는 일곱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후손들을 위해 괴산에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귀양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어진 이후에는 손자에게 희망을 두었다. 이문건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자손들은 괴산으로 옮겨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이문건이 남겨놓은 양아록은 조선시대 양반의 유일한 육아일기로 역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이 되었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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