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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온몸으로 살라 /정찬주

법정스님의 화두 되새기며 멀리서나마 쾌유를 빕니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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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09-12-25 20:34:37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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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내리기 며칠 전에 서울에서 손님들이 내려와 종일 내 산방에서 머물다 갔다. 조용한 손님은 아니었다. 서울의 M텔레비전 방송국 사람들이 인터뷰를 하고 갔다. 사전에 질문 요지를 먼저 보내주고 대화했다면 좀 더 분명하고 간결하게 대답했을 텐데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내가 마지못해 허락한 일이니 일정 부분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처음에 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한 달 보름 동안 십여 차례나 전화를 받고 보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 방송작가와 PD는 경기도 곤지암에 사시는 팔순이 가까워지는 도예가 김기철 선생님까지 동원했다. 목소리가 딸아이 같은 방송작가가 주로 전화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거절하기도 뭐했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고, 좋은 공기 속에서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 칭병(稱病)하기도 미안하여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제작하는 방송 내용이 나를 몹시 망설이게 했다. 강원도 오두막에 사시는 법정스님의 삶을 영상화하고 있는 중인데, 그 내용 일부는 스님의 제자들 중에서 자연에 귀의하고 사는 사람들을 담는다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노환으로 편찮으시기 때문에 불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내내 찜찜하기만 했다. 또 다른 이유는 법정스님을 가까이서 따르는 상좌와 재가제자들이 많은데 말석에 앉은 내가 꼭 방송에 들어가야 하는 문제였다. 한마디로 나는 스님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고, 정성을 다해 모셔보지 못한 부끄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M방송국 사람들은 나를 압박했다. 스님께서 지난 봄에 길상사에서 법문하시는 모습이나 강원도 오두막과 조계산 불일암, 그리고 스님의 제자들도 다 촬영했는데 나만 빠졌다고 하소연했다. 답답해서 무슨 기준으로 재가제자들을 선정했냐고 물으니 서울 길상사 주지 덕현스님이 추천했다고 하면서 더 변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기차표를 끊어 서울 길상사를 다녀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덕현스님에게 "어른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다른 제가불자들도 많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어른스님은 눈앞에 있는 제자보다 멀리 있지만 자기세계를 이루고 사는 제자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과연 내 세계가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니 그렇지도 않아 속으로 민망했지만 덕현스님이 추천한 것은 사실이므로 나는 산방으로 돌아가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했다.

인터뷰에서도 한 말이지만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1985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샘터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스님의 원고를 받으러 불일암을 자주 찾았던 것이다. 회사일로 가는 출장길이었지만, 나는 1박2일 출가하는 기분으로 서울을 떠나곤 했다. 나중에는 아예 아내와 두 딸아이를 데리고 불일암으로 내려갔다. 마침내 나는 몇 년 뒤 회사일과 상관없이 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불일암으로 가 하룻밤을 잤다. 호반새가 공중제비를 하는 단옷날 아침이었다. 나는 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스님께서는 저잣거리에서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과 함께 계첩을 주시고, 오계를 받는 공덕이 무엇인지 법문을 해주셨다. 오계는 '나를 비춰보는 거울이자 내 행동을 바로잡아줄 신호등과 같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해 여름 스님께서는 분홍빛 한지에 휘호를 써 보내주셨다. 내용은 지금까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부처님 말씀인데, 스님께서는 세 구절 속에 팔만대장경의 깊은 뜻이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해 보니 당당하게, 걸림 없이, 청정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스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는 길인 것 같고, 임제선사의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 서 있는 곳마다 진리의 자리가 되는' 참사람(無位眞人)이 아닐까 싶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스님께서는 늘 지금 이 순간에 '온몸으로 살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이 온몸으로 사는 것인지, 스산한 세밑이라고 해서 접어둘 수 없는 화두다. 불법인연을 맺어준 스님께 감사드리며 쾌유를 멀리서 엎드려 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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