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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걸인 앞에서의 망설임 /이명원

동정심조차 박제되어버린 현대사회의 슬픈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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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09-10-05 20:33:05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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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반 내 유년의 마을에서 동냥하는 걸인을 하루에 한두 번 마주치는 것은 비교적 낯익은 풍경이었다. 선량했던 당시의 아이들은 왜 어른이 동냥을 하는 걸까 궁금해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배고픈 사람에게 일단 밥을 주어야 한다며 걸인을 집으로 이끌고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론 부모님들은 그 걸인에게서 풍겨나는 악취 때문에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순진한 아이의 눈빛을 거부하지는 못했던지 배고픈 걸인에게 밥 한 공기 대접하는 수고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초대받은 걸인이 고개를 돌려 소박한 밥상에 차려진 김치와 보리밥을 꿀떡꿀떡 어두운 식도로 넘기는 장면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오늘도 착하게 살았다, 하며 금방 대문 밖으로 우우 달려 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우리 마을에는 비 오는 날이면 괴성을 지르며 자기 옷을 찢곤 하던 한 미친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 커다란 망태기를 짊어지고 휴지와 고철 등을 줍던 넝마주이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면 아이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양아치다" 소리치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마을 저편에서는 뒤틀린 몸짓이나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던 바보 청년이 느릿느릿 길을 지나갔다.

내가 살던 서울의 변두리는 화재민촌으로 불렸다. 그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들은 어딘가에서 일어난 대화재 때문에 집을 잃고 그곳에 임시로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집을 지을 돈도 땅도 없었기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은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판자촌을 형성했다가, 나중에 슬레이트집을 지었다. 내 기억이 옳다면 우리 집은 초가집이었고, 마당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이 있었으며, 마중물을 부어야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동식 펌프가 있었고, 펌프의 손잡이를 연결하는 날카로운 이음새에 동생이 머리를 다쳐, 할머니가 우는 동생의 이마에 된장을 처발라 아버지가 동네 의원으로 달려가던 풍경이 기억난다.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동네에 드물지 않게 가게 되지만, 그 장소에서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어떤 기억의 실종이다. 야산의 으스스한 무덤들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서 있다. 서울의 여느 마을들이 그렇듯, 내 유년의 동네 역시 지금은 조밀한 아파트의 행렬과 대형쇼핑몰과 번쩍거리는 자가용들과 교회들과 모텔들과 상가들로 분주하다.

그러나 길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내 유년시절에 두꺼운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원주민들은 찾기 어렵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기자마자 새롭게 이주한 젊은 부부들과 소비사회의 평준화된 일상이 그 동네의 풍경을 재구성했다. 이제 그 동네에서 걸인을 찾기는 어려우며, 미친 여자의 괴성을 들을 수 없고, 넝마주이나 바보스러운 청년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문명이 세련된 진보와 해방을 만끽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우리들의 일상문화에서 미끈하게 방부처리되어 격리되어버렸다. 마을에서 살 수 없는 걸인들은 대규모 역사 주변에서 마지막 살 길을 찾았고, 괴성을 지르던 여자와 바보 청년은 각종 시설들로 분산 수용되었거나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거지들을 제 손으로 이끌고 밥을 먹여야 한다며 부모에게로 데려올 동심은 희박할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천성이 변했다기보다는, 이 즈음의 우리 아이들은 피로한 열차처럼 늘어져 있는 학원스케줄에 제 자신이 파김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침에 우연히 보았던 한 걸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을 뒷산 정자에서 자고 있었던 그 걸인을 백발의 할머니가 쫓아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마뜩잖았지만 할머니의 청을 들어준다는 흉내라도 내어야겠기에 "아저씨, 청소하게 일어나세요"라고 나는 걸인에게 말했다. 그런데 더러운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킨 걸인은 뜻밖에도 키 큰 여자였다. 그것은 내게 작은 충격이었는데, 바로 그 순간 "이 정자는 내가 청소했어. 어서 썩 가버려. 왜 더럽히고 있는 거야"하고 내 옆의 할머니가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질렀다. 그것은 노인이 내기에는 자못 끈질기고 날카로운 소리였지만, 이미 내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공허하고 서글퍼져, 당신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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