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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9-04 18:35:3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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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닫혀있는 집 문을 두들긴다. 한참을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 외치던 그녀는 902호란 번호를 본 뒤에야 자신이 엉뚱한 곳을 집으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윽고 천천히 물러서는 카메라는 건너편에서 바라본 아파트의 전경으로 시야를 넓힌다. ‘벌새’의 오프닝은 영화의 메시지와 전개를 단숨에 함축한다.
영화 ‘벌새’ 스틸.
이 영화는 집이란 공간으로 표상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정상성에 들어서지 못한, 불안으로 가득 찬 영혼의 내밀한 이야기이자, 한국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다들 겪었을 법한 보편적 경험의 이야기이다. 김보라 감독은 간결하고도 엄격한 구성의 도입부에서 넌지시 암시를 건넨 뒤, 관객의 의식을 재현된 근현대사의 시공간 속으로 끌고 간다. 아직 역사라 부르기엔 낯익고 금세 손에 잡힐 듯한, 하지만 닿자마자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기억의 시간 속으로.

‘벌새’가 보여주는 1994년은 전혀 낭만적인 정취를 띠지 않는다. ‘유열의 음악앨범’이 노스탤지어의 대상이자 통속적 멜로드라마를 배경 삼아 과거를 극적으로 윤색하고 소비한다면, ‘벌새’의 시선은 반대로 미세한 일상 속에서 반복되었을 폭력과 소외의 순간들, 비루하고 데데한 가족의 초상에 집중한다. 이 영화의 정서는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쓸쓸하고도 처연한 독백에 가깝다. 누구나 경험했지만 잊고 외면코자 했던, 기억의 쓰레기장 저편에 파묻혀 애써 기억해주지 않으면 잊히고 말았을 상처를 영화는 은희의 눈을 통해 들추고 환기해내고자 한다.

허공에 떠 있기 위해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해야 하는 벌새처럼, 은희는 집에 정을 주지 못하고 바깥을 맴돈다. 집은 공부를 강요하며 욕설을 일삼는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오빠의 폭력, 교실은 성적을 잣대로 학생들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선생이 장악하고 있다. ‘벌새’의 인물들은 공부를 매개로 계급과 신분을 유지, 재생산하는데 목을 매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들이다. 오빠는 서울대란 목표를 부여받은 스트레스를 은희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풀고, 언니는 일탈을 거듭하며, 은희 또한 부모의 시선을 피해 골목이나 트램펄린, 디스코장과 같이 숨이 트일 수 있는 틈새를 찾아서 방황한다. 교감이 단절된 채 명령만이 주어지는 억압의 양상 속에서 인물의 심리는 이중적으로 분열되고 일그러진다. 이들에게 절실한 건 서예학원의 선생님과 같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 교감을 나눌 가족적 관계이지만, 정작 가족은 정서적인 연대감을 결여한 채 경제 공동체로서의 기능만 남아버렸다.

남은 것은 친구 간의 우정 또는 사랑이겠지만, ‘벌새’는 이 남은 틈새마저 막혀버린 현실의 출구 없음을 응시한다. 은희의 남자친구가 “얘가 방앗간 집 딸 걔니”하는 어머니의 손에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에서처럼, 연애에도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다. 그리고 영화는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건의 기억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무너져 끊겨버린 성수대교의 교각. 그것은 가족애, 우정, 사랑 등 그 어떠한 인간적 가치, 소통과 교감의 관계망이 끊겨버린 한국사회, 단절과 고립의 현실에 대한 역사적, 시각적 대응물에 다름 아니다. ‘벌새’는 단절의 구조 속에서 소통의 활로를 찾아 헤매는 영혼의 몸부림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개인의 시점에서 사회구조의 총체를 환기해내는 명민한 화법의 영화이다. 우리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의 에드워드 양에 필적할 만한 젊은 거장의 탄생을 맞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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