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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세대에 걸친 국가 범죄의 역사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4-10 18:40:03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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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사업에 실패하고 돈이 필요해진 문성(박정학)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30년 만에 고향 군산을 찾는다. 간첩 조작사건에 엮여 고초를 치른 아버지에겐 무죄가 선고되어 받은 거액의 국가보상금이 걸려있다.
중년의 위기에 처한 남자가 삶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흔하다. 만약 평범한 연출가였다면 재산 처분과 진로 문제를 둘러싼 인물 간의 갈등과 충돌에 힘을 쏟으며 통속적인 드라마를 만들었을 것이다. ‘파도치는 땅’(2018·사진)에서 감독 임태규의 선택은 다르다. 그는 범용한 이야기로도 얼마든지 결이 다른 영화, 작가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아는 연출가이다. 서사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의 메시지는 문학적 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의 논리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으로 축소된 이야기 안에서 감독은 인물과 공간을 풍경처럼 다룬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와이드 숏으로 포착되는 영화의 공간학적 지형도이다. 아파트와 고층빌딩으로 단정히 구획 지어진 도시 공간 서울의 깔끔함은 근대의 흔적들이 낡고 풍화된 채로 버려진, 인적조차 드문 군산의 황량함과 대비를 이룬다. 서울에서 군산으로의 여정은 곧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과도 같다. 현재의 번영에 묻혀 모두가 잊어버린 비참한 과거, 심지어 알고 있는 이들조차 일부러 외면했고 누군가의 독백으로서만 남을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문성이 병실에서 다시 아버지를 마주하며 상념에 잠기듯, 관객은 카메라가 훑는 장소마다 그 안에 깃든 역사의 이미지를 환기하게 된다. 군산의 현재 풍경을 과거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들의 사진과 뉴스 릴(주요 사건을 필름에 담아 상영하는 기록 영화)에 교차시키는 몽타주는 영화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폭력의 씨앗’(2017)에서 인물의 뒷모습을 따라 움직이는 스테디캠 촬영을 구사한 감독은 이 영화에선 엿보듯 관조하는 스틸 숏과 고정된 카메라의 수평 이동에 기댄다. 영화에는 세심하게 의도된 두 번의 패닝(수평 이동) 숏이 있다. 노인과 대화하는 문성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파노라마처럼 군산의 전경을 조망하고 화면 좌측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들을 비춘다. 이 패닝은 여관 발코니에서 밖을 바라보는 아들과 실내의 아버지를 한 호흡에 연결하며 역방향으로 반복된다.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긴 이 패닝은 마치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를 간신히 연결하려는 기나긴 끈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으로 한 세대는 저물고 국가 폭력의 역사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용의주도하게 설계된 영화의 엔딩, 유치원에서 손녀를 챙기는 아들을 문성이 지켜보는 장면은 그렇지 않다고 속삭인다.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 화면 구석에 흐릿하게 등장하는 문성은 카메라가 아들과 손녀에게 초점을 맞추고 줌 인하면서 사라진다. 과거 세대의 퇴장. 그러나 남겨진 현재와 미래 세대가 국가 시스템 안에서 행복하리라 안도하기엔 영화의 미장센은 불길하다.

손녀가 머리에 맨 노란 리본, 찰흙으로 빚은 모형배는 세월호 참사를 암시하며 과거의 국가 범죄를 현재와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치는 땅’은 세대에 걸쳐 반복되는 역사에 관한 영화이다. 국가의 본성이 달라지지 않는 한 역사의 비극은 반복될 것이라는 묵직한 경고가 파도치는 해변의 소금 거품 마냥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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