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 일본 상대 소송 실화 소재
- 원고단 이끈 문정숙 역 맡아
- 행여 10년쯤 시간 지난 뒤에
- 위안부 역할 제의 온다면
- 흔쾌히 수락, 열연 펼치고파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데뷔 이후 35년간 정상의 자리에 있었던 배우 김희애가 한 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후 “더욱 성숙해졌다”고 말했다. 또 “배우로서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역할”이라고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프게 느껴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관부재판을 영화화한 ‘허스토리’(개봉 27일)와 자신이 맡은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 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화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을 이끄는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 역을 맡은 김희애. 오른쪽 사진은 영화 속 김희애의 모습. YG엔터테인먼트 제공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부산 지역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일본 정부의 보상 판결을 받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막강한 연기 내공을 지닌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역을, 김희애가 개인의 삶을 뒤로 한 채 6년간 관부재판을 이끈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 역을 맡아 묵직한 울림을 준다. 특히 김희애는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캐릭터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의 어느 역할보다 진정성을 가지고 연기한 김희애를 만나 ‘허스토리’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소재로 한 영화다. 출연제의를 받고 고민했나.

▶출연 결정은 정말 고민 없이 덥석 했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제대로 줬구나. 내가 하면 잘 할 텐데’ 했다. 하지만 이내 후폭풍이 밀려왔다. 얼마나 힘든 역할인지 제대로 인지를 못했던 것이다.

-‘제대로 줬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감이었다. 부끄럽지만 처음에는 사명감을 갖거나 고민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힘들어져서 피하게 되고 도망 다녔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는 재판정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할머니들이나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그들을 돕는 문정숙 캐릭터를 보며 한 인간을 잘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촬영 준비를 하고 연기를 하면서 ‘이렇게 몇 십 년 안 된 가까운 이야기를 내가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혹시 극중 문정숙 역의 실존 인물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 회장을 만났나?

▶아흔 살이 넘으셨다고 하는데, 만나 뵙진 못했다. 관부재판 당시 예순 살이 넘으셨다고 하는데, 여행사를 경영하시다가 우연히 할머니들과 연을 맺어 줄곧 곁에 있으셨다고 한다.(김희애는 인터뷰 진행 이후인 지난 15일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허스토리’ 시사회장에서 김 회장과 만남을 가졌다.-편집자주)

-문정숙 역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고 들었다.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는 어떻게 연습했나?

▶최대한 진심을 가지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는 한글로 써서 외웠다. 재판정에서 감정을 담아 빨리 말을 해야 해서 어렵더라. 지난해에 촬영을 마쳤는데, 지금도 긴 대사를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부산 사투리였다. 문정숙은 부산 사람이어서 어설프게 하면 금방 티가 나니까 진짜 열심히 연습했다.

-함께 연기한 분들이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소위 ‘선생님’ 배우 분들이다. 50대에 막내 배우였던 것도 새로웠겠다.

▶너무 든든했고, 선배님들과 연기하면서 자랑스러웠다. 몇 십 년 연기를 하셔서 대충해도 될 것 같은데 정말 열심히 준비하셨다. 재판정 장면을 촬영할 때는 마치 리사이틀 공연을 하는 것처럼 온힘을 다 쓰셔서 기운이 다 빠질 정도였다. 특히 연기하시면서 살짝 떨려하고, 상기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감동적이었다. 나 또한 선배님 나이가 돼서도 신인처럼 떨림을 갖고 카메라 앞에 서야겠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같이 하셨으면 좋겠고, 후배들을 위해 나도 열심히 하겠다.

-혹시 10년 뒤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역할을 하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문정숙 단장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허스토리’. NEW 제공

▶그런 생각은 안 해봤지만, 맡겨지면 열심히 해야하지 않겠나. 영화나 드라마나 알맹이가 있고 제가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작은 역할이라도 할 것이다. 그것이 배우로서 기쁨이고 행복이다.

-‘허스토리’를 “배우로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나를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연기가 확 달라졌다고 말하진 못하지만, 인간적으로나 배우로서 한 단계 성숙해졌다고 믿는다. 촬영을 다 마치고 분장실에서 저도 모르게 서러움, 시원함 등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 왔는데, 뭔지 모를 그 경험이 좋았다. 특별한 경험을 준 작품이었다.

-변치 않는 우아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

▶어머님이 잘 낳아주셔서 좋은 조건이 도움이 됐지만 평소에는 지나치게 평범하다. 아이들이 “엄마가 TV에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연기인생과 실제 생활을 분리해서 산다.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을 때는 아이들 친구 학부형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영화와 드라마, 두 매체를 오가며 활동하는 어려움은 없는가?

▶드라마건 영화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나를 선택해주면 열심히 한다. 너무 할 것이 없으니 숏커트하고 남자 역할을 여성으로 바꿔서도 할 수 있을 정도다(웃음). 그래서 ‘허스토리’와 같은 기회는 귀하다. 지금은 백수다. 가리진 않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것은 못하겠고, 내게 맞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