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는 봄에만 눈길을 끄는 줄 알았다. 지천으로 핀 샛노란 산수유꽃이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도는 봄이면 어느 누가 몽환적인 상상에 빠지지 않겠는가. 국내 최대 산수유 산지인 전남 구례는 봄철 축제를 열어 전국의 나들이객을 유혹한다. 그런데 산수유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은 이때뿐만이 아니다. 이른 봄날의 노란 꽃과 함께 늦은 가을의 붉은 열매가 반긴다. 산수유꽃이 진 자리에 맺힌 녹색 열매는 찬바람이 불 즈음 붉은색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익어간다. 상춘객을 유혹하는 것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단풍도 차츰 지는 때에 점점이 달린 붉은 열매가 은은한 가을의 정취를 물씬 드리운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의 계곡 옆에서 한 어린이가 빨갛게 익은 열매를 따려고 산수유나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유인숙 시인은 '산수유 꽃담길'이라는 시에서 '지리산 품에 안긴 산수유 마을의 삼월은/ 어깨 걸듯 정답게 이어지는 돌담 따라/ 산수유 꽃등 켜는 꽃담 길로 오고// 온 산이 단풍으로 타오르는 시월은/ 영롱한 유리알로 산수유 붉게 익어가는/ 꽃담 길에 도란도란 추억으로 머문다'라며 산수유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

산수유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의 향기를 좇아 부산에서 차를 몰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을 찾았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구례·화엄사IC에서 빠져 산수유문화관이나 산수유마을을 찾으면 된다. 구례는 우리나라 산수유 생산의 70%를 차지하며 산수유의 조상 나무인 시목을 모시는 곳이다. 구례가 우리나라 최고의 산수유 산지로 꼽히는 이유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나는 지리적 기후적 요건이 산수유가 자라는 데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산동면에 접어들자 가로수마다 빨간 열매가 빼곡히 매달려 있지만, 아직 푸른 잎이 열매를 감싸 안고 있어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산동면 상위마을로 향했다. 도로에도 돌담길에도 집 안마당에도 산수유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아직은 부끄러운지 얼른 잎으로 감싸 안았다. 계곡 옆에 쭈그리고 앉은 아이가 낮게 깔린 가지에서 산수유 열매를 따더니 손으로 으깨보며 신기해했다. 새콤한 맛을 보고는 얼굴을 잠시 찡그리더니 은은한 단맛에 연신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산수유사랑공원에 설치된 산수유 꽃 조형물.

상위마을 구길본 이장은 "구례 산동면은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양 등의 영향으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한다. 오는 20일께면 잎이 떨어지면서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미 수확을 시작한 곳도 있었다. 일부 주민은 나무에 올라가 일일이 열매를 손으로 따거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장대로 털어서 수확했다. 요즘은 열매를 터는 기계를 이용하기도 한다. 옆집에서는 열매를 딴 후 깨끗이 씻고 있었고 산수유를 마당에 널어 건조하는 집도 있다. 수확한 산수유는 조금 물러질 때까지 며칠을 놔두었다가 씨를 제거하고 정성 들여 잘 건조해 차 한약재 옷감염료 등으로 가공된다.

채취한 산수유 열매를 건조하기 위해 마당에 널어놓은 모습.

산수유는 약 1000년 전 중국 산둥 성의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올 때 나무를 가져와 심은 것이 시초란다. 이곳 지명이 산동면인 것도 그 영향이다. 실제 산동면 달전마을에는 할아버지 시목이, 계척마을에는 할머니 시목이 있다. 이후 산수유나무는 마을 전역으로 퍼졌고 가난한 산촌의 생계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마을 사람들이 산수유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는 뜻이다. 한 주민은 "어릴 때는 깐 산수유 한 고봉에 10원을 받았는데 이 돈을 모아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고 소개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산동처녀는 쉽게 알아본단다. 산동처녀들은 어릴 때부터 입에 산수유 열매를 넣고 앞니로 씨와 과육을 분리했는데 오랫동안 이 작업을 반복해 앞니가 많이 닳았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산수유씨를 평생 입으로 분리해온 산동처녀와 입 맞추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보다 이롭다고 알려지면서 인근 남원 순천 등지에서 며느리로 들인다는 이야기다.

산수유 열매 조형물이 매달린 산수유문화관.

산수유마을에서 조금 내려오면 산수유사랑공원과 산수유문화관을 만난다. 산수유사랑공원은 3만 ㎡에 조성돼 있다. 산수유의 꽃말인 '영원불멸의 사랑'을 모티브로 한 프러포즈존, 언약의 문, 사랑마루, 산수유 꽃담길 등 여러 가지 테마공원이 만들어져 있어 가족 연인 친구와 평소 나누지 못했던 사랑과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공원 내에는 거대한 크기의 산수유 꽃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바위에 앙증맞은 분재들이 눈길을 끈다. 산수유사랑공원 한쪽에는 거대한 산수유 열매 조형물이 달린 산수유문화관이 있다. 구례 산수유의 우수한 품질과 효능, 역사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체험학습에도 좋다.

산동면 계척마을의 산수유 시목.

계척마을 시목지로 향한다. 산동면사무소를 돌아 수락폭포 갈림길에서 갈라지는 계척마을에는 테마파크가 조성돼 있다. 폭포와 분수 등이 설치돼 있고 남도 이순신길 백의종군로가 지나간다. 할머니 시목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잎이 여느 산수유보다 넓게 펼쳐져 있다. 아직 열매가 알알이 맺히는 등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다. 문의 산동면사무소(061-780-2981)


■ 그외 가볼 만한 곳

- 이웃사랑·나눔의 운조루·곡전재
- 1급수 섬진강 민물고기 생태관도

①

산수유의 달콤 쌉싸름한 맛을 한껏 즐겼다면 방광마을로 이동해보자. 논 한가운데 외로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멀찍이 차를 대고 다가가는 순간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느티나무는 높이가 20여 m에 달하고 가지마다 잔뜩 잎을 매달고 있다. 누군가 때맞춰 가져다 놓은 듯 경운기가 시골 풍광을 잘 살리고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일하던 농부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효자 나무다.

②

여기서 구례읍을 지나 20분(12㎞) 정도 하동 방면으로 이동하면 운조루와 곡전재(①)를 만난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1776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랑채 부엌 뒤주에 적힌 '타인능해(他人能解·누구나 열 수 있다②)'라는 글귀에는 마을의 배고픈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 류이주의 정신이 담겨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동학, 여순사건, 6·25 전쟁 등을 지내면서도 운조루가 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에 있다는 말도 나온다. 운조루를 방문할 때는 종부 할머니에게 입장료로 1000원을 내야 한다. 할머니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능해의 정신을 배운 뒤에는 일부러 종부 할머니를 찾아가 돈을 내기도 한단다.

③

운조루 옆에는 운조루유물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5905㎡ 부지에 건축 총면적 886㎡로 전시실 1동, 주차장 및 부대시설 등을 조성한 뒤 운조루로부터 유물을 기탁받아 지난 4월에 문을 열었다. 인근에 곡전재도 자리하고 있다. 1929년에 지어진 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주인의 호가 곡전이어서 곡전재라 불린다. 당시 영호남의 부자들이 선호했던 부농의 민가 형식을 따왔다. 고택의 모양은 금가락지 형태로 둥글게 만들어졌다. 입장료는 없지만,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모금함이 입구에 놓여 있다. 여기서 하동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간전면에는 섬진강어류생태관(③성인 2000원, 청소년 1000원)이 있다. 2008년 3월 우리나라 5대 강 중 유일하게 1급수를 유지하는 섬진강의 민물고기 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보전과 생태전시를 위해 조성됐다. 수달도 만날 수 있다.

글·사진=유정환 기자 defiant@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