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네덜란드인 36명 제주도 표착
- 조정 훈련도감에 배치, 화포술에만 관심
- 일행 본국 송환 요구하다 강진으로 추방
- 병영성에서도 선진 과학기술 활용 못해
- 일본은 적극적 교역으로 선진문물 수용

- 병영성 발굴조사 거쳐 성벽 등 복원
- 인근 하멜기념관 유물 150여점 전시

17세기 세계 무역의 중심국은 네덜란드였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전 세계 무역 총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처리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시기 조선에 네덜란드와 통상할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 찾아왔다. 동인도회사 선원 얀 얀스 벨테브레(생몰연대 미상) 일행, 헨드릭스 하멜(1630~1692) 일행과의 조우가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1627년과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다 태풍에 휩쓸려 제주도에 표착했다.

전남 강진군 병영면 전라병영성 북문. 문 앞에 반원형 옹성이 조성돼 있다. 성 뒤로 월출산이 보인다.

그러나 조선은 두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 멸망한 명나라 문화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사로잡혀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서양의 선진 문물에 눈과 귀를 닫았기 때문이다. 반면 1609년부터 네덜란드와 교역을 시작한 일본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근대화의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착착 닦아 나갔다.

그 결과 일본은 근대국가로 발돋움했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지난달 25일 하멜 일행이 7년간(1656~1663년) 머물렀던 전남 강진군 병영면 전라병영성으로 역사 기행을 떠났다. 양국의 엇갈린 선택을 되짚어 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우물 안 개구리' 조선 조정

전라병영성 옛 지도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 8월 하멜이 승선한 스페르베르 호 선원 64명 중 36명이 살아남아 제주도 해안에 떠밀려왔다. 그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반응은 어땠을까? 당시 효종실록 기사를 보자.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박연은 하멜 일행보다 26년 앞서 제주도에 표착해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 금려는 임금을 호위하는 훈련도감을 말한다. 하멜 일행에 대한 심문에서 통역을 담당한 박연은 그때 훈련도감에서 조선군에게 화포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의 화포술에만 관심을 보였다. 네덜란드인이 왜 화포술에 뛰어난지, 네덜란드는 어떤 나라인지, 일본과 네덜란드의 무역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 정작 궁금증을 가져야 할 사안들에는 심문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상식선에서 의문을 품고 차근차근 따져 물었다면 네덜란드의 국력이나 일본의 야심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실록에는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화란(和蘭)'이나 '아란타(阿蘭陀)'라고 썼던 네덜란드의 한자어 표기조차 볼 수 없다. 단지 '남쪽 오랑캐'일 따름이었다. 이듬해 6월, 한양으로 압송된 하멜 일행을 접견한 효종(孝宗·1619~1659) 또한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향으로 보내주길 간청하는 일행에게 "들어온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조선의 법도에 없다"며 "너희 나라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다. 효종에게 일행은 이색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전라병영성 앞 하멜기념관의 네덜란드 풍차.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을 박연의 부하로 삼아 훈련도감에 배치했다. 그해 겨울 일행은 한강을 오가며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집주인이 날마다 우리에게 땔감을 가져오도록 해 먼 산까지 가야 했다. 하나님이 돌봐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 겨울을 넘긴 1655년 3월, 일행 중 두 명이 큰 사건을 저질렀다.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 튀어나와 사신의 말고삐를 붙잡고 본국 송환 주선을 호소하는 소동을 벌인 것이다.

"총알같이 조선 옷을 벗은 뒤 네덜란드 옷으로 갈아입고 타타르(청나라) 사람들 앞에 섰다. 우리는 왕성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두 사람은 감옥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얼마 후 죽었다." 그 사건으로 하멜 일행은 강진 전라병영성으로 추방됐다. 그곳 생활은 더 고달팠다. "땔감을 해 주민들에게 팔았는데, 옷을 너무 오래 입어 벌거벗은 것 같았다. 대부분의 식사는 쌀과 소금, 물만으로 해야 하니 슬프고 괴로웠다." 일행은 병영성 동문에서 500m가량 떨어진 은행나무 근처의 민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30m, 둘레 6.75m에 달하는 이 나무는 현재 나이가 800살이 넘는 점을 미루어 일행의 거주 당시에도 넓은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 노릇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417년(태종 17) 쌓은 병영성은 전남과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다스리는 육군의 총지휘부였다. 길이 1060m, 높이 4.87m에 면적이 9만3000여 ㎡나 된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1997년만 해도 지휘부를 비롯한 모든 건물이 소실된 채 일부 성곽만 남았으나, 19년에 걸친 발굴조사와 복원을 통해 동·서·남·북 4개의 성문과 문루, 성벽, 성가퀴, 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 등 대부분의 시설이 옛 모습을 찾은 상태다. 지금은 성 내부 건물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소중화로 근대화 낙오 자초

하멜기념관 앞에 세워진 하멜 동상.

서문 뒤편 멀리 우뚝 솟은 월출산의 험준한 바위 능선이 듬직하게 다가온다. 병영성은 이를 비롯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월출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의 지류인 금강천이 병영면 평야를 적시고 있어, 산 사이의 협곡만 차단하면 군량미 걱정 없는 철옹성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런 중요 군사시설에서도 하멜 일행이 지녔던 선진 과학기술 지식은 활용되지 않았다. "관찰사가 매달 두 번씩 시장 바닥이나 관청 앞 광장, 담장 밖의 풀을 뽑아 깨끗이 할 것을 명령했다"는 하멜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1661년부터 3년 내리 흉년이 이어져 식량 부족 현상이 심해지자, 1663년 하멜 일행은 남원과 순천에 각 5명,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12명이 분산 배치됐다. 하멜은 여수로 옮겼다. "여름에는 뙤약볕에, 겨울에는 비와 눈과 우박 속에 온종일 세워놓았다. 날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화살만 열심히 갖다 날랐다." 3년간 허리띠를 졸라 돈을 모은 하멜은 1666년 9월 시세의 곱절을 주고 산 배를 타고 동료 7명과 함께 탈출을 감행해 마침내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

하멜 생존 당시 네덜란드어 책.

조선의 당시 세계 인식과 대응 수준이 갓난아이라면, 일본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1636년 일본은 나가사키 앞바다를 메워 1만3000여 ㎡ 크기의 인공섬을 건설했다. '데지마(出島·출도)'란 이름의 미니 섬이다. 포르투갈 상인을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막부의 거듭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그만두지 않은 데다, 급기야 이듬해 기독교도의 반란이 일어나자 막부는 데지마에서 포르투갈을 추방해 버렸다. 그 대타로 선정된 나라가 네덜란드. 이후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일본의 이익도 컸다. 나가사키 인근 아리타 지방의 청화백자가 네덜란드로 대량 수출된 게 그 한 예다. 흰색 바탕에 갖가지 푸른 무늬를 미려하게 새긴 청화백자는 유럽인들을 매료시켰다. 많이 팔릴 때는 한꺼번에 3만 점이 수출되기도 했다. 아리타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곳이다. 그 한 명인 이삼평(李參平·미상~1655)은 여기서 청화백자를 만들어 일본 도자기의 시조가 됐다. 조선에서는 일본보다 1, 2세기 앞서 청화백자가 만들어졌다. 만일 조선이 네덜란드와 교역을 했다면 조선의 청화백자가 네덜란드와 유럽시장을 주름잡았을 것이다.

일본의 최대 소득은 네덜란드를 통해 수용한 서양 학문, 곧 '난학(蘭學)'이다. 특히 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 자연과학과 측량술 포술 제철 등 과학기술 분야가 일본 근대화의 지렛대가 됐다. 인력 중력 분자 속력 진공 신경 연골 동맥 등 현재 일상용어가 된 자연과학의 기본 개념들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학문을 들여오면서 만든 번역어다. 우리는 일본의 시각으로 서양을 보고 있다.

하멜 생존 당시 신발 등 생활도구.

하멜은 귀향 후 '하멜표류기'를 출간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문헌을 보고 조선과 직접 교역하기 위해 1000t 급 상선 '코레아 호'를 건조했다. 하지만 일본 막부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출항하지 못했다. 조선이 세계경제에 진입할 수 있는, 그를 통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일본이 봉쇄해 버린 것이다. 이 또한 조선의 무지와 무관심이 자초한 불행이다.

전라병영성 앞에는 하멜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강진군이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하멜 생존 당시의 동·서양 도자기와 생활도구, 고지도 등 150여 점의 유물을 확보해 2007년 건립했다. 이곳에는 하멜의 일생, 17세기 네덜란드의 활동상과 세계적 위상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한 구절이다. "서양의 선진 문물을 앞서 받아들인 일본은 순조롭게 근대로 접어들었던 반면, 뒤처진 조선은 근대화의 길에 그만큼 늦게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뼈아프지만 외면해선 안 될 자성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