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교적 신분질서 법이던 조선서
- 평등 주창한 '유재론' 내세운 혁명가
-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에 구체화
- 당시의 봉건 이데올로기와 대립
- 벼슬살이 내내 탄핵·파직 등 시련

- 고향인 강릉만이 정신적 안식처
- 애월당·초당 고택 그리며 시문 남겨
- 결국 역모 혐의 못벗은 채 능지처참
- 왕정 없어진 민주공화정 한국사회
- 그가 부르짖던 평등사상 남아있는지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인류를 시민 민주주의로 이끈 프랑스혁명(1789년) 인권선언문 제1조다. 루소나 볼테르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정치철학이 그 모태다. 인간의 천부인권에 대한 자각은 유럽에만 있었을까? 서구 중심적 시각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뿐이지 조선에도 프랑스혁명보다 170여 년이나 앞서 이런 사상이 또렷한 목소리로 존재했다. 천재 문인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 그 주창자다.

	교산 가문의 고택 앞에 허엽·성·봉·초희·균 다섯 부자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국문학사에서 이들을 '허 씨 5문장'이라 부른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귀한 집 자식이라 해서 풍부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 옛날 어진 임금은 인재를 초야에서도 구하고 항복한 오랑캐 장수 중에서도 뽑았으며, 도둑 중에서도 끌어올리거나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했다." 교산의 논설 '유재론(遺才論)'의 핵심 문장이다. 그는 신분에 의한 인간 차별은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라며 천부인권을 역설했다. 이 사상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구체화됐다.

교산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우리나라는 서구보다 일찍 근대사회로 들어설 수 있는 체제를 갖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교적 신분 질서를 불변의 윤리 규범으로 내세웠던 조선의 지배층에 이는 역적이자 사문난적의 망언에 불과했다. 결국 교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미완의 혁명가로 남았다. 그의 평등사상은 어떻게 잉태됐을까? 지난 6일 교산의 고향인 강원도 강릉을 찾아 그의 시문을 통해 그 연원과 행적을 추적했다.

■봉건 이데올로기와의 불화

	교산 허균

교산은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자리한 외가 '애일당(愛日堂)'에서 태어났다. 오대산 줄기인 교산 기슭에 있었던 애일당은 현재 덩그러니 터만 남아 있다. 이 산에는 이무기(蛟龍·교룡) 전설이 내려온다. 산속 큰 바위 밑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면서 구멍이 뚫려 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바위를 교문암(蛟門岩), 산을 교산이라 불렀다. 야트막하지만 구불구불 뻗은 산세가 이무기가 기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교산은 자신의 호를 이 산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호를 쓸 때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는 좌초한 그의 혁명사상을 상징한다. 애일당 터에는 교산의 시 '누실명(陋室銘)'을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교산의 생존 당시에는 애일당의 전망이 탁 트였지만, 지금은 사방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린다. 그가 자란 경포호 서편 초당동은 애일당에서 16㎞가량 떨어져 있다. 그곳을 보려면 산마루로 올라가야 한다. 산마루에는 펜션이 들어서 있다. 펜션 마당 끝에 서면 에메랄드빛 경포대 앞바다와 새하얀 해변, 짙푸른 초당동 송림과 경포호의 고즈넉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초당동에는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 자 형태로 배치된 교산 가문의 고택이 복원돼 있다. 고택 주위에는 높이 20m를 웃도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빼곡히 숲을 이루고,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드넓은 경포호가 펼쳐져 그윽하고 평온한 정취를 자아낸다. 고택 앞에는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 악록(岳麓) 허성(許筬·1548∼1612), 하곡(荷谷) 허봉(許篈·1551~1588),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1563~1589)와 교산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은 우리 한문학사에서 '허 씨 5문장'으로 문명을 떨쳤다.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는 애일당 터. 건물은 없고 교산의 시비가 들어서 있다.

애일당과 초당동 고택은 교산의 정신적 안식처였다. 그는 벼슬살이 내내 탄핵과 파직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31세 되던 해인 1599년 황해도 도사를 제수받았다가 그해 12월 기생을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됐고, 39세 때인 1607년에는 삼척부사로 내려갔다가 부처를 섬긴다고 벼슬을 잃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고향을 그리며 시를 썼다.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요(禮敎寧拘放·예교영구방)/뜨고 가라앉는 것은 천성에 맡기노라(浮沈只任情·부침지임정)/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君須用君法·군수용군법)/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룰 테니(吾自達吾生·오자달오생)'. 삼척부사 직에서 쫓겨난 뒤 쓴 시에서는 언제든 벼슬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겠다는 의지가 뚜렷하다. 그 자신감의 버팀목은 고향이다.

'걸음이 사촌에 이르니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누나(行至沙村忽解顔·행지사촌홀해안)/교산은 여태껏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네(蛟山如待主人還·교산여대주인환)/붉은빛 정자에 홀로 오르니 하늘이 바다에 이어졌구나(紅亭獨上天連海·홍정독상천연해)/나는 아득히 넓은 봉래산에 있다네(我在蓬萊縹緲間·아재봉래표묘간)'. 34세 때인 1602년 사복시정 자리에서 밀려나 지은 시에는 귀거래의 기쁨이 넘쳐난다. 첫 시구의 '사촌'은 현 사천이다.

■'교산 평등사회' 실현?…"글쎄"

	허균의 한정록.

교산의 정치적 시련은 봉건 이데올로기와의 불화에서 기인했다. 거기에다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불세출의 천재성도 한몫했다. 봉건 이데올로기는 사·농·공·상의 계급과 적서차별, 남존여비, 억불숭유의 경직된 제도를 고수하는 성리학적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을 거부하는 그의 기질과 천재성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처럼 갈등을 격화시켰다.

마침내 불화는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며, 남녀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 없다"거나 "시대적인 변고라도 생기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란 호민(毫民)이다.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는 반체제적 사상으로 표출됐다. 호민은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백성을 뜻한다.

교산이 이런 사상을 갖게 된 원천은 가족이다. 특히 작은형 하곡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곡은 교산 못지않은 명문장가였다. 사람을 신분이 아닌 인품으로 판단했던 하곡의 인간관에서 교산의 평등사상을 볼 수 있다. 그 일단이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를 겨냥해 올린 하곡의 탄핵상소에서 드러난다.

	홍길동전.

당시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율곡은 국경도시 종성이 호인(胡人)에 포위당하자 국토방위를 위해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징발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타고 싸울 말이 부족했다. 율곡은 그 대안으로 말을 헌납하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지령을 내렸다. 그 결과 말을 많이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일면적인 해결책이었다. 돈 있는 사람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없는 사람만 전쟁에 나가게 되는 불평등을 낳기 때문이다.

하곡은 상소에서 이런 폐단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선조의 노여움을 사 경기도 순무어사에서 창원부사로 좌천된 데 이어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됐다. 하곡은 3년 후 풀려났지만 한양 입성 금지령이 내려져 외지를 떠돌다 병이 들어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요절했다. 교산은 하곡을 통해 인생의 스승 두 사람을 만났다.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과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1544~1610)다. 둘 다 하곡의 절친한 벗이다.

손곡은 당시풍의 시를 잘 써 백광훈(白光勳·1537∼1582), 최경창(崔慶昌·1539∼1583)과 함께 '삼당 시인'으로 꼽혔다. 양반 아버지를 둔 손곡은 빼어난 재능을 지니고서도 어머니가 종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혀 평생 가난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교산은 손곡에게서 시를 배우며 신분제의 폐해를 절감했다.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손곡은 시만 읊었는데(蓀谷吟詩到白頭·손곡음시도백두)/백 편이 모두 아름다워 유장경의 경지에 가깝구나(百篇穠麗近隨州·백편농려근수주)/요즘 사람들은 겉만 보고서 비웃으며 손가락질 한다지만(今人肉眼雖嗤點·금인육안수치점)/강물은 앞으로도 끝없이 흐르리니 어찌 고치게 할 수 있으랴(豈廢江河萬古流·기폐강하만고류)'. 손곡을 위해 쓴 이 시에서 교산은 철옹성처럼 견고한 신분제의 벽을 개탄한다. 두 번째 시구 중 '수주'는 당나라 시인 유장경이 자사 벼슬을 했던 고장이다.

교산은 사명당에게선 불교 사상과 자신을 희생해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배웠다. 사명당을 깊이 존경한 그는 사명당이 입적한 뒤 발간한 문집의 서문과 비문을 썼다. 교산은 비문에서 "나는 비록 유가에 속하는 무리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잘 알고 있다"고 사명당과의 관계를 밝혔다. 이 인연은 교산이 불교에 몰입하는 촉매제가 됐다. 아울러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승려들을 최하층 천민에 계속 묶어두는 억불숭유 제도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24일, 교산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 혐의를 벗지 못한 채 능지처참이란 극형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한 세기 전 절대 왕정이 퇴출되고 민주공화정에 들어선 지 60여 년이 흐른 지금, 교산의 신원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까? 아직 자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가 대물림되면서 사회계급으로 굳어져 가는 '헬조선'이 우리의 현실인 까닭이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