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 최초 서양식병원 제중원
- 의료선교가 근대화 불 지펴

- 청라언덕의 옛 남문안예배당은
- 후신 대구제일교회로 남아
- 독특한 양식의 선교사 주택은
- 선교·의료·교육 박물관 꾸며

- 고딕 양식의 계산동성당 인근엔
-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택 보존
- 소설 '마당 깊은 집' 속 건물들도

역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대한제국 3년이던 1899년, 장소는 대구읍성 남쪽 계산동 약전골목 내 남문안예배당.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 우드브리지 존슨은 예배당에 당시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현 동산의료원)'을 세운다. 대구 근대화의 불씨를 지핀 순간이었다.

저항시인 이상화 고택. 대구 시민들이 합심해 보존했다.

제중원 설립을 계기로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습득한 지식인들이 사회 각 분야에 자리 잡아 지도적 활동을 펼치고, 약령시를 비롯한 토착상권이 민족자본을 축적해나가면서 대구는 근대사회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런 주체적 역량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부단한 저항으로 이어져, 희망과 절망이 엇갈린 격동의 한 세기를 직조해갔다. 그 숨 가쁜 시절의 흔적이 중구 계산동 일대 '근대문화골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난달 23일 그 흔적을 찾아 현장으로 갔다.

■의료선교, 대구 근대화의 시작

진골목 내에 있는 정소아과의원.

대구 근대골목 기행은 제중원 건립지에서 1㎞ 남짓 떨어진 동산동 언덕에서 시작했다. 가곡 '동무생각'의 가사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다. 이곳에는 현재 동산의료원과 남문안예배당의 후신인 대구제일교회, 서양 선교사들이 1906~1907년 설립한 계성중·고교와 신명고교 등이 들어서 있다. 대구제일교회 뒤편에는 고풍스러운 2층 건물 세 채가 서 있다. 1910년에 지은 선교사 주택이다. 동산의료원 측은 1999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이 건물들을 선교·의료·교육역사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선교박물관은 대구의 첫 여성 선교사인 마르타 스위처가 살았던 곳이다. 1907년 철거된 대구읍성의 성돌을 주춧돌로 삼아 붉은 벽돌을 쌓고 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서 유행했던 방갈로풍으로 지었는데, 한국인의 정서를 감안해 양식과 한식의 조화를 꾀한 특이한 건물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과정에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정원에서 자라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제중원 설립자인 존슨 박사가 미국 미주리 주에서 가져온 72그루의 사과나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나무의 2세로 수령이 70년 정도 된다. 존슨 사과나무들은 대구·경북 전역으로 퍼져 나가 '대구 사과'의 기원이 됐다.

선교박물관. 선교사 스위처의 주택이었다.

의료박물관과 교육역사박물관은 지붕을 제외하곤 선교박물관과 건축양식·구조가 유사하다. 의료·교육역사 박물관은 지붕까지 온전한 서양식이다. 챔니스 선교사의 주택인 의료박물관에는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다. 1900년대 상아청진기, 1930년대 금바늘 주사기와 안과검사용 현미경을 비롯해 19, 20세기 동서양 의료기기가 소장돼 있어 근대의학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도 보관돼 있다. 존슨 박사의 부인이 사용했던 것으로, 1800년 미국에서 제작된 골동품이다. 1901년 부산항으로 들여와 낙동강을 통해 나룻배로 대구 사문진까지 운송한 뒤 목도로 집에 옮겼다.

교육역사박물관(블레어 선교사 주택)에는 대구지역 3·1운동 관련 사료들과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사진 등이 전시돼 있어 당시 사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의료박물관과 교육역사박물관 사이에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이 노래는 이은상(1903∼1982) 작사, 박태준(1900~1986) 작곡으로 1922년 발표됐다. 대구가 고향인 박태준은 서양음악의 개척자로, 최초의 창작 동요 '가을밤' 등 많은 명작을 남겼다.

■청라언덕에 꽃핀 사랑과 열정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

"박태준 선생이 계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사모했던 소녀는 신명학교 여학생이었답니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할 때 국어교사였던 이은상 선생에게 짝사랑을 고백했는데, 이 선생이 즉석에서 가사를 써줬답니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이다. 지금도 선교사 주택의 담벼락에는 푸른(靑·청) 담쟁이덩굴(蘿·라)이 덮여 있다. 그래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의료선교로 시작된 근대화가 문화로 한창 성숙해가던 시절이었다.

대구제일교회와 의료박물관 사이에는 소로가 나 있다. 1919년 3월 8일, 계성학교·신명학교·성서학당·대구고보 학생들이 청라언덕 솔밭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뒤 시내로 진출하는 도중에 거쳐갔던 3·1운동길과 90계단이다. 90계단 담벼락에는 대구 3·1운동, 서문시장 등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90계단을 내려와 도로를 건너면 두 개의 대칭형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계산동성당이 나온다. 1902년 완공된 고딕양식의 이 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90계단.

성당을 지나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이상화·서상돈 고택이 마주 보고 있다. 일제가 강점한 식민지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읊은 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쓴 저항시인 이상화(1901~1943)는 이 집에서 1939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이상화 고택에는 대구 시민들의 자긍심이 서려 있다. 지역개발로 고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시민들은 2002년부터 보존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서명과 모금 등 6년여 동안 매달린 끝에 고택을 새로 단장해 2008년 8월 문화재로 개관했다.

서상돈(1850~1913) 고택도 대구 시민들의 자랑거리다. 서상돈은 보부상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 한 해에 3만 석을 거두는 거부로 자수성가한 민족자본가다. 그는 부를 혼자 누리지 않았다. 학교를 짓고 계몽서적과 신문을 발간하는 출판사를 설립하는 등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앞장섰다. "지금 국채 1300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를 갚으면 나라는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 추세일 것입니다." 그는 1907년 1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고 제공한 차관을 국민이 대신 갚아 국권을 지키자는 취지의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다. 운동은 비록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중도에 좌절됐지만, 그해 4월 말까지 전국에서 4만여 명이 참여해 230여만 원을 모금하는 등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민들이 일치단결하는 구심점이 됐다.

■어렵지만 아름다웠던 시절

200여 개의 점포가 밀집한 약전골목.

길은 약전골목으로 이어진다. 약 700m 길이의 이 골목에는 한의원, 제탕·제환·제분업소, 약재상 등 200여 개의 점포가 좌우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대구 민족자본의 한 터전이다. 약전골목의 기원은 1658년(조선 효종 9)부터 개장된 약령시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리던 한약시장으로, 경상감영 내 객사 주변에서 개장되다가 1908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약전골목 안은 쌉싸래한 한약재 향기가 가득하다. 보약을 먹은 듯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옛 대구제일교회. 고딕양식의 높은 첨탑이 인상적이다.

약전골목 초입에는 옛 대구제일교회가 있다. 제중원이 처음 둥지를 틀었던 그곳이다. 1908년 남문안예배당을 헐고 고딕양식으로 새로 지은 이 교회의 종탑은 높이가 5층에 달한다. 인근에는 옛 교남 YMCA회관도 자리하고 있다. 1914년 건립된 이 건물은 3·1운동 때는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장소로 쓰였고,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약전골목의 끝자락에는 실핏줄 같은 좁다란 진골목이 있다. 골목 이름은 '길다'의 경상도 사투리인 '질다'에서 따왔다. 이 골목은 대구 토착세력인 달성 서 씨의 집성촌으로, 여성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은가락지 은장도 은비녀 등 패물을 모아 국채보상금에 보태려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그 주축이었다. 골목에는 또 작가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에 등장하는 정소아과의원과 백록요정 등 유서 깊은 건물이 즐비하다.

대구시 중구 '근대문화골목' 끝자락에 있는 '진골목'. 1907년 여성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2㎞ 남짓한 대구 근대골목 기행은 진골목에서 끝을 맺는다. 짧은 거리이지만, 큰 울림을 주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에 진한 여운이 남는다. 여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채보상운동에서 보듯 위기 때 꽁무니를 빼지 않고 전면에 나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는 사회지도층의 모습이 여운의 발원지다. 그들이 살았던 근대는 어렵고 힘들지만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