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빚은 한 편의 영화, 홋카이도

정세윤 기자 spica@kookje.co.kr
| 입력 : 2016-05-04 18:54:31
| 본지 15면

추웠다. "한국의 초봄 날씨"라는 여행사의 정보만 믿고 얇은 겉옷 몇 장만 가지고 간 게 실수였다.

홋카이도 신치토세 공항에 내리는 순간 쌀쌀한 바람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본토의 최남단 규슈와 홋카이도는 위아래로 약 1900㎞ 떨어져 있다.

한국보다 더운 일본 남부지방보다 위도가 훨씬 높다. 4월 말 홋카이도는 추위가 느껴지지만 한여름에는 평균 기온 22도로 시원하다.

해양성 기후인 덕에 한겨울에도 못 견딜 정도로 춥지는 않다고 한다. 신치토세 공항을 빠져나오자 산은 아직도 녹지 않은 눈으로 덮여 있다.


	지옥불처럼 뜨거운 계곡을 지나…노보리베쓰 지코쿠다니. 하얀색 계곡바닥과 검은 황화철 바위가 대비되며 도깨비가 사는 지옥 계곡을 상상하게 한다.

■지질학적인 경이들

신은 홋카이도에 불편만 주지 않았다. '지질학적인 경이'도 선물했다. 지코쿠다니(지옥계곡)가 있는 노보리베쓰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지코쿠다니는 히요리산의 분화활동으로 생겨난 계곡이다. 약 450m 길이의 계곡을 따라 수많은 온천 분출구가 있다. 입구부터 유황냄새가 코를 찌른다. 철광석이 유황을 만나 검은색을 띤 황화철 돌과 바위가 흩어져 있는 풍경은 지구가 아닌 외계행성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런 기기묘묘한 풍경 때문에 이곳은 도깨비가 사는 지옥계곡이라고 불린다.

여행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산책로의 끝에는 '뎃센 이케'라는 작은 간헐천이 있다. 평범한 물웅덩이처럼 보이지만 몇분마다 맹렬한 기세로 수증기를 내며 끓어오른다. 이 계곡에서는 만성 피부염에 좋다는 유황천, 무좀 등에 효과가 있다는 명반천, 신경통에 좋다는 식염천 등 9가지의 온천수가 1분에 약 3000ℓ뿜어져 나와 주변의 호텔이나 료칸에 공급된다.

또 하나의 지질학적인 경이는 도야지방에 있는 도야호수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도야호수는 약 11만 년 전 거대한 분화로 생겨난 호수다. 둘레가 약 50㎞로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칼데라(화산 분출로 중앙부가 붕괴된 뒤 물이 찬 지형) 호수이다. 거대한 크기와 함께 짙푸른 물색깔로 인해 호수가 아닌 바다처럼 보인다. 유람선을 타고 나가면 호수 중앙에 있는 섬까지 갈 수 있다. 도야호수 주변에는 1943년 보리밭에서 화산활동으로 융기한 쇼와신산도 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일본 쇼와천황시대(1926년~1989년)에 새로이 생겨난 산이다. 아직도 연기와 열기를 내뿜고 있으며 높이는 402m에 달한다. 우체국장이자 아마추어 지질학자였던 미마치 마사오란 사람이 쇼와신산의 융기과정을 자세히 관찰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가면 이 사람이 측량하는 모습을 묘사한 동상을 볼 수 있다.

■도시의 풍광과 먹을거리


	별처럼 내려앉은 야경에 넋을 잃고…하코다테항의 야경. 홍콩·나폴리와 함께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하코다테산에 올라가면 감상할 수 있다.

홋카이도는 본래 아이누인들이 살고 있었던 땅. 일본은 1854년 미일친화조약을 맺으면서 홋카이도 남단의 항구도시 하코다테를 개항했다. 그래서 홋카이도에는 일본양식의 건축물이 본토에 비해 비교적 적은 반면 서양식 건축물이 많다. 1910년에 완공된 옛 하코다테 공회당도 서양풍의 건물이다. 유럽 대저택 못지않은 베란다에 기둥은 화려한 문양의 르네상스식이다. 거실에는 식물 문양의 영국산 벽지가 발라졌다.

하코다테에 있는 5각 별모양의 요새인 고료카쿠도 유럽의 성곽도시를 모델로 한 독특한 건축물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난학자(네덜란드 학자)인 다케아 아야사부로에 요새 설계를 명령해 1866년에 완공했다. 1867년 대정봉환(통치권을 천황에 넘김)으로 위기에 처한 막부 세력 중 일부가 이곳으로 건너와 신 정부군과 마지막 결전을 치른 곳이기도 하다. 막부군을 물리친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준비한다.


	'러브레터'처럼 떠오른 첫사랑 추억…오타루의 운하. 오르골과 유리 공예로 유명한 도시이자 "오겡끼데스까(잘 지내시죠)?"라는 대사가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의 주요 배경이다.

이곳에는 현재 1600여 그루의 왕벚나무에서 만개한 벚꽃이 장관이다. 한여름 밤에는 하코다테의 역사를 재현하는 시민 창작 야외극이 펼쳐지고 별 모양 요새 주변을 2000여 개의 조명으로 장식하는 '고료 별의 꿈' 행사도 열린다.

케이블카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하코다테 산에 오르면 홍콩, 나폴리와 함께 세계 3대 야경으로 불리는 하코다테항이 맞는다. 날개에 별이 촘촘히 박힌 나비라고 할까. 두 개의 만이 나비의 가는 허리를 이루고 건물의 불빛들이 나비의 날개에서 반짝인다.


	11만 년 전 화산 분화로 생겨난 도야호수.

홋카이도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오타루는 오르골의 도시였다. 네덜란드인들의 소개로 처음 오르골이 전래된 뒤 개량해 왔는데 남녀의 춤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오르골부터 공중관람차 형태, 현미경으로 빛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형태 등 인간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오르골은 다 있다. 오르골로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들으며 잠시 동심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오타루는 한때 홋카이도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일본은행 지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화폐 박물관으로 쓰인다. 두께가 40~50㎝ 정도 되는 육중한 금고의 철문 뒤에는 1000억 엔(약 1조원)의 (모형)현금이 쌓여 있는데 이만한 현금을 차곡차곡 쌓으면 부피가 얼마 정도 될까 궁금한 사람들은 방문해 보자.


	삿포로 도심.

홋카이도의 중심도시 삿포로에는 아카렌가(붉은 벽돌)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홋카이도청 옛 본청사가 있다. 미국의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1888년에 건설됐다. 부지 내 정원에는 안개 벚나무와 천엽 벚나무 등 다양한 벚나무 수종이 있다. 아직 벚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5월 말에는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목련이나 튤립 등 다른 다양한 꽃들도 많이 심어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TV전파탑으로 쓰이다 지금은 퇴역해 전망대로 쓰이는 삿포로 TV탑에 오르면 삿포로 시내를 360도 파노라마로 전망할 수 있다. 높이는 147m. 삿포로의 숨겨진 맛집인 'Soup Curry Samurai'에서 맛본 카레가 독특했다. 한국에서는 먹은 기억을 떠올릴 수 없는 맛이지만 매운 정도를 1~10단계로 조절해 주문할 수 있고, 카레에 들어가는 닭의 튀김 강도도 세세하게 고를 수 있다. 홋카이도는 또 털게, 킹크랩, 대게 등 게요리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