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오목대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살짝 휘어진 팔작지붕 한옥의 용마루 선이 아름답다.

- 남원 노봉마을은 최 작가 부친 고향
- 작품 주 무대이자 문학의 모티브
- 주요 등장인물 효원의 모델은 모친
- 일제시대 옹골찬 여인의 삶 담아

- 전주 한옥마을 최 씨가 나고 자란 곳
- 생가터 50m 옆엔 최명희문학관
- 경기전~전동성당~오목대 길 따라
- 17년 집필의 발자취 고스란히

모국어는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 빚어내기도 한다. 그 모국어는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른 불덩어리가 된다. 시대의 어둠을 사르고 생명에 온기를 불어넣는 혼불이다. 소설가 최명희(1947~1998)는 17년 세월을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심정으로 혼신을 기울여 모국어를 다듬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영혼의 자식이 원고지 1만2000장짜리 대하소설 '혼불'이다.

1930, 40년대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식민지 시절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핍진하게 담아낸 '이야기 근대사'다. 혼불은 살아 숨 쉬는 근대의 서사인 동시에 우리말과 풍속사의 보고이기도 하다.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은 "혼불은 앞으로 소설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고 평했다.

최 작가는 정말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 가지만 꼽는다면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그 세대들이 거쳐온 고난과 인고의 자취를 낱낱이 훑은 최 작가의 이 말은 어둠을 빛으로 역전시킨 민초들의 혼불을 확인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확신에 찬 발언이다. 한 해가 저물던 지난해 12월 31일, 새해를 밝힐 혼불을 찾아 최 작가가 나고 자란 남원·전주로 떠났다.

■강인한 여성, 나약한 남성

최명희 작가

소설은 강인한 여성성과 허약한 남성성을 부각한다. 매안 이 씨 집안의 삼대 종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큰 축이다. 청상의 몸으로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 그의 손자 강모와 결혼한 효원이 그들이다.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코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백성이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남의 나라를 망하였다, 할 수 있단 말이냐." 가뭄 피해를 막기 위해 사재를 털어 조성한 청호저수지를 완공하던 날 한일합방이 되자 동요하는 주민들에게 청암부인이 한 말이다. 나라를 빼앗긴 남성들에게선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담대한 기개가 서려 있다.

"놉은 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집 농사를 지어 주는 우리 손이요. 우리 발 아닌가요? 놉을 남이라고 생각하면 놉도 우리를 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일에 제 몸을 부릴 때 누가 성심을 다 허겠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몸이 움직이는 법인데, 배를 곯리고 마음을 상하게 한 뒤에 무슨 정성을 바랄 수 있을까요?" 놉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제공했다고 시어머니가 나무라자 효원이 당당하게 내뱉는 말에서도 청암부인 못지않은 배포가 묻어난다. 반면 남자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무책임하다. 효원의 남편 강모가 대표적이다. 강모는 아내를 배신하고 사촌 여동생 강실과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그리곤 직장 공금을 횡령한 뒤 술집 기생 오유끼와 동거하다 근친상간 사실이 알려지자 동거녀와 함께 만주 봉천으로 도피해버린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 친필 원고.

이들이 마을의 지배세력인 '원뜸' 사람들이라면, 마을의 아래쪽에는 이 씨 집안의 소작인을 비롯한 하층민이 사는 '거멍굴'이 있다. 양반계층을 적대시하는 옹골네와 춘복, 당골네인 백단 등이 그들이다. 자기 자식만은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여선 안 된다고 생각한 춘복은 양반댁 강실을 겁간해 임신시킨다. 여기에다 사회주의사상에 물들어 계급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강호 강태 등 강모의 사촌 형들의 이야기가 겹치면서 갈등구조는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여나간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최 작가의 집안사를 소재로 삼았다. 효원은 최 작가의 어머니가 모델이라고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윗대로 이어지는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캐고 싶었다." 최 작가는 소설 집필 동기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일제강점기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가 혼불에 이르러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된다"며 "역사의 격심한 갈등과 대변혁 속에서도 의연히 민족혼의 알맹이를 마모시키지 않고 영글 수 있게 만든 것은 옹골찬 여인들의 한 많은 삶이 다져낸 넋의 아름다움 때문이다"고 평했다.

■등 뒤엔 노적봉, 눈앞엔 지리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을 필사하는 젊은이들.

노봉마을은 최 작가의 성씨인 삭녕 최 씨의 집성촌이다. 전체 47가구 중 30여 가구가 최 씨다. 삭녕 최 씨는 조선 중엽인 1400년대 후반 노봉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봉마을은 등 뒤에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듯 우뚝하게 솟은 노적봉이 버티고, 눈앞에는 동쪽으로 지리산의 능선이 물결처럼 흐르는 지세로 전체적으로 안온하고 포근한 느낌을 자아낸다. 소나무가 검푸르게 우거진 노적봉의 기맥이 아래로 뻗어내리다가 기슭에 이르러 평평한 둔덕을 짓는데 그 모습이 발등처럼 도도록하다.

현재 둔덕에는 외형을 한옥으로 꾸민 혼불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남원시가 최 작가의 문학혼을 기리기 위해 49억 원을 들여 2004년 10월 완공해 문을 열었다. 문학관 내부에는 강모와 효원의 혼례식, 달에서 임신 정기를 받으려는 효원의 흡월정, 상사병으로 죽은 강수의 영혼결혼식, 액막이 연날리기 등 소설 속의 풍속사 명장면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 그 가운데에는 최 작가의 집필실도 재현돼 있다. 성경호 혼불문학관장은 "개관 이후 널리 알려지면서 월평균 8000여 명씩 연간 10만여 명이 찾고 있다"며 "노적봉 자락 아래 댓잎소리가 들리는 문학관에서 '혼불'을 읽는 즐거움과 '혼불'이 주는 감동, '혼불' 정신을 듬뿍 받아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있는 혼불문학관 설경.

문학관 아래에는 소설 속에서 청암부인이 조성한 청호저수지가 있다. "옛적에 한 고명허신 어른이 마을 서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느긋하게 잡아 묶어서, 큰 못을 파고 그 기맥을 가두어 찰랑찰랑 넘치게 방비책만 잘 강구한다면, 가히 백대 천손의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을 누릴 만한 곳이다 하고 이르셨더란다." 청암부인이 아들에게 하는 말처럼 문학관은 뒤에는 노적봉이 받치고, 앞에는 청호저수지가 보호막이 되고 있어 천년만년 누릴 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안겨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곳은 풍요와 나눔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문학관 뒤에는 삭녕 최 씨 종가가 있었다. "노적봉의 엄연한 기상이 뻗어 내리면서 똬리를 튼 곳에, 높다랗게 솟아오른 검은 지붕이 마음을 응시하듯 내려보고 있다. 솟을대문 옆에는 하늘로 치솟을 듯 우람한 둥치의 은행나무가 서 있고, 중마당 안에는 늙은 줄기가 반이나 거멓게 웅크리고 있는 매화 고목이 있다"고 소설에 표현된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장승규 사매면장은 "몇 년 전 원인 모를 불이 나 전소되면서 고아한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종가를 볼 수 없어 아쉽다"며 안타까워했다.

■전주 한옥마을, '혼불'의 또 다른 산실

한옥마을 오목대 누각.

아버지의 고향인 노봉마을이 소설을 잉태한 원형질이라면,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과 교동에 자리한 한옥마을은 그 원형질에 소설이란 몸을 부여한 작품의 또 다른 산실이다. 그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공부를 모두 전주에서 마쳤다. 한옥마을에는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국보 317호)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궁궐)'을 중심으로 700여 채의 한옥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전주부성 안으로 들어와 상권을 장악한 데 반발해 1930년을 전후로 한국인들이 형성하기 시작한 게 한옥마을의 유래다.

한옥마을에는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경기전과 부채문화관 사이에 있는 문학관은 작고 아담하지만, 최 작가의 50세 인생이 남긴 것을 거의 빼놓지 않고 모아놓았다. 문학관에 가면 먼저 대문 밖에 세워둔 밀짚모자를 쓴 석상이 방문객을 반긴다. 목도리를 두르고 '최명희 혼불'이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있다. 문학관 내부에 들어서면 당장 중앙에 전시된 원고지 더미에 눈길이 간다. 혼불 총원고량의 3분의 1인 4000장만 쌓아 놓았는데도 높이가 어른 허리에 이른다. 모든 원고지를 다 쌓으면 높이가 3m에 달한다. "나는 나의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원고지 한 칸마다 나 자신을 조금씩 밀어 넣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원고지에는 최 작가가 밀어 넣은 마음과 몸이 깃들어 있다. 문학관 한쪽 끝에 마련된 책상에는 젊은이들이 앉아 혼불을 필사하고 있었다. 최 작가의 '17년 글감옥'을 조금이나마 느껴보려는 시도였다.

경기전 맞은편에 위치한 전동성당.

문학관에서 50m가량 떨어진 곳에는 최 작가의 생가터가 있다. 건물이 재개발되면서 생가는 사라졌다. 문학관과 생가터는 '최명희길'로 이어져 있다. 생가터를 지나 최 작가가 생전에 집필하다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경기전~전동성당~오목대 길을 걸었다. 경기전 정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을 본 뒤 전동성당으로 향했다. 천주교 순교 일번지인 이곳은 프랑스 신부 보두네가 순교의 뜻을 기려 1914년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동서양의 평화로운 공존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동성당에서 500m가량 가면 오목대가 나온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정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갈 때 이곳에서 '대풍가'를 부르며 연회를 열었다. 해발고도 100m 남짓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곳에 오르면 한옥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작지붕을 한 크고 작은 한옥이 옹기종기 무리를 지은 사이사이로 오밀조밀 실핏줄 같은 골목길이 나 있다. 한옥마을의 역사는 벌써 80년을 넘어 사람으로 치면 노인이 됐지만, 아직 10, 20대처럼 팔팔하다. 그래선지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언제나 젊은 '혼불'들이 느긋하게 활보하고 있다. 올해로 완간된 지 20년을 맞은 '혼불'은 세대를 아우르며 미래로 흐르고 있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과 진실은 변치 않는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