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정

- 성리대전 읽고 큰깨달음 얻어 유학 전념
- 신어산 아래 산해정 짓고 학문·인격수양
- 합천 이주후 뇌룡정서 제자들 교육 힘써
- 61세때 산청 지리산품에 안겨 여생 보내
- 산천재 시절엔 실천 중심 경의사상 확립

'초지일관(初志一貫)'. 한 해가 저물 때면 떠오르는 말이다. 연초의 다짐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지만, 그럴수록 한결같지 못한 부끄러움에 비례해 새해에 기대는 절실함은 커진다. '처음'과 '끝'을 한마음으로 붙들어 맬 수 있는 묘안이 없을까 고민하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정신적 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올바른 마음을 길러(敬·경) 정의를 실천한다(義·의)'는 젊어서 세운 뜻을 죽을 때까지 관철해 우리 지성사에 '행동하는 양심'의 사표로 우뚝 선 분이기에 나약한 심신을 교정할 일침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다.

'남명 기행'의 초점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남명 경의사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사상이 경북 청량산으로 상징되는 것과 대별된다. 청량산이 이름 그대로 맑고 서늘한 기상(본지 지난달 5일 자 18면 참조)을 지녔다면, 지리산은 모든 사람을 감싸줄 수 있을 듯 넉넉하고 의연하다. 남명은 평생 지리산을 닮으려 했고, 죽어서도 지리산이 보이는 곳에 묻혔다. 남명이 지리산을 좇아간 길을 따라가 보자.

■산해정 시절

	뇌룡정

'청컨대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請看千石鍾·청간천석종)/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난다네(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어찌하면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남명이 말년에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로 이주해 덕천강가에 지은 '세심정(洗心亭)'이란 정자 기둥에 써 붙인 시다.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과 기운(浩然之氣·호연지기)을 그가 지리산에서 체감했음을 시는 말한다. 자신이 해와 달로 삼은 경과 의가 지리산에 응축돼 있다고 본 것이다. 두류산은 지리산의 옛 이름이다. 남명의 경의사상은 어디서 싹텄을까. 그 근원을 알려면 산해정(山海亭) 시절(1530~1545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을 이루겠다'는 뜻이 담긴 이 정자는 그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신어산 자락에 세운 강학소다.

	산천재

산해정 시절 초기, 남명은 과거 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문장이 과문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성리대전'을 읽는다. 그는 그 책에서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1209~1281)의 글을 보고 크게 깨쳐 학문의 대전환을 맞는다. 절친한 친구인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선물한 '대학' 책갑 안에 남명이 쓴 글에 그 전말이 자세히 나와 있다. "허 씨가 '나아가 벼슬하면 나라를 위해 크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 은거해 있으면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을 보고서 나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위축되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이후 남명은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다. 1498년부터 일어난 세 번의 사화(士禍)로 사림파의 수많은 선비가 희생되고 조정에는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부패한 훈구파 관료들이 득세하고 있어 벼슬하기보다 초야에 묻혀 도덕을 갈고닦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기(理氣)나 사단칠정(四端七情) 같은 형이상적 명제에 매달리는 것을 배척하고 심성 수양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세우려는 실천적인 경향이 굳어진다.

	신명사도.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 그림이다.

이런 면모는 남명이 1534년 지은 '민암부(民巖賦)'라는 시에 잘 나타난다. '궁실의 넓고 큼은 험함의 시작이요/세금을 끝없이 거둬들임은 험함의 쌓음이요…비록 그 험함이 백성에게 있다지만/어찌 임금의 덕에서 말미암지 않겠는가'. '민암'의 의미는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인데, '백성의 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라'는 서경의 글귀에서 유래했다. '임금은 배이고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엎기도 한다'는 순자의 글귀와 같은 맥락이다.

지난 25일 찾아간 산해정(신산서원)에는 남명의 인품처럼 고졸하고 단아한 풍취가 배어 있었다. 건물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산해정 마루에 서면 주동리 일대가 빠짐없이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소나무가 이웃이 되니/바람 불고 서리 내리는 때 아니어도/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건물 앞에 세워진 남명 시비의 글자들이 하오의 햇살 속에 빛나며 대나무처럼 꿋꿋하게 추위에 맞서고 있었다. 남명의 후손인 이곳 관리인 조규태(71) 씨는 "대학교수와 대학원생 등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며 "남명 선생이 타계하신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후세들의 사표가 되고 있어 후손으로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뇌룡정 시절

	산천재 벽의 농경도. 남명이 그린 것을 복원했다.

남명은 48세 되던 해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으로 이주해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친다. '뇌룡'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으면서도 용처럼 신비한 조화를 드러내고, 연못처럼 고요히 있으면서도 뇌성처럼 울린다'는 장자의 글귀에서 따온 말로, 깊이 침잠해 도덕을 닦아 그 덕화가 절로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계부'는 '닭이 알을 품듯이 묵묵히 들어앉아 심성 수양에 힘쓴다'는 뜻이다.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는 뇌룡정 시절(1548~1560년)에 쓴 글이다. 1555년(명종 10) 단성 현감에 임명되자 고사하면서 올린 상소다. 남명은 이 글에서 당대의 정치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는 듯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합니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소윤(윤원형) 일파가 장경왕후의 비호를 받는 대윤(윤임) 일파를 숙청하면서 1545년과 1547년 두 차례에 걸쳐 사화가 발생해 남명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한 선비 100여 명이 희생되고 국정이 소윤 일파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데 대한 질책이다. 남명은 글의 말미에 '마음을 바로 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점으로 삼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써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아 왕도의 법을 세우라'고 명종에게 당부한다.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토로한 것이다.

	남명기념관에 전시된 남명집.

지난 22일 들른 뇌룡정은 잘 단장돼 있었다. 합천군이 남명이 태어난 외가가 있는 토동과 본가 소재지인 삼가면 하판리 지동을 잇는 남명로를 조성해 문화유적 탐방코스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룡정은 남명이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에 따라 지었다.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해 도식화한 것이다. 마음 안팎의 경계를 성곽으로 표시했는데,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한다. 남명은 성곽을 통해 외부의 사욕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삼가현 선친의 옛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는데, 가난해 매일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부엌에서 일하는 아이가 때때로 송사리를 잡아 오는데, 그물이 없어 못가에서 땀만 흘릴 뿐입니다. 명주실이 있어야 그물을 짜 고기를 잡지요." 뇌룡정 뒤편 남명을 제향한 용암서원 앞에 세워놓은 남명의 서신비석 내용이 애처롭다. 벼슬을 마다하고 지조를 지키며 처사로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된다.

■산천재 시절

	남명을 제향한 합천 삼가면 토동의 용암서원.

남명은 61세 때 지리산 곁으로 거처를 옮긴다.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지리산의 품에 안긴 것이다. 남명의 사상이 완성되는 산천재 시절(1561~1572)이다. '산천'은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빛이 발하도록 덕을 새롭게 한다'는 주역 대축괘의 글귀에서 따왔다. 그 기쁨이 뇌룡정과 같은 날 둘러본 산천재 기둥의 주련에 오롯했다. '봄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나만(春山低處無芳草·춘산저지무방초)/이사한 이유는 천왕봉이 상제가 사는 곳에 가까움을 좋아하기 때문이네(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빈손으로 들어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까(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은하수 같은 십 리 맑은 물 아무리 퍼마셔도 남음이 있겠구나(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시에서 '상제'는 천도(天道)를 상징하고, '은하십리'는 산천재 앞을 흐르는 덕천강을 가리킨다. 평생 이어진 가난은 변함이 없지만 남명의 마음은 지리산처럼 의연해졌다. 산천재 마당에 서니 지리산이 넓은 가슴을 열고 기자에게 "걱정 말고 네가 올바름을 확인한 대로 밀고 나가"하며 묵언의 격려를 하는 것 같았다. 남명 또한 살아생전 매일 지리산에게서 그런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산천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산 아래 건물은 선비문화원이다.

산천재에서 남명의 실천이성은 더욱 강고해진다. 86세 되던 1568년(선조 1) 임금에게 올린 상소인 '무진봉사'를 보자. 여기서 그는 '백성을 잘 다스리는 도의 요점은 임금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 되게 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학문관과 방법을 논한 대목이다. "아래로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는 것(下學人事 上達天里·하학인사 상달천리)이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사람의 일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은 곧 입에 발린 이치이며, 자신에게서 돌이켜보지 않고 들어서 아는 것만 많은 것은 곧 귀에 발린 학문입니다." 실천이 전제되지 않은 이론이성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꾸짖은 것이다.

	산청 남명기념관의 남명 동상

퇴계의 학문관도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사문의 종장인 사람이 오로지 상달만 주로 하고, 하학은 궁구하지 않아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을 이루었습니다. 일찍이 그와 더불어 서신을 왕복하며 논란을 했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지금 이 폐단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문인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다. 남명의 이런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돼 지리산 같은 우뚝한 학파를 형성했다. 그 결과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구국에 나서는 실천적 지성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 발발 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던 왜적의 예봉을 꺾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의병의 기력이 고갈된 정유재란까지 왜적과 싸웠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등 의병장 다수가 남명의 제자다. 그 정신은 지리산에 깃들어 오늘날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