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 '미믹' '판의 미로' '퍼시픽 림' 등을 연출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영화마다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로 판타지 스릴러 장르의 대가가 됐다. 특히 민담 속의 요정이나 유령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변주하는 이야기꾼의 능력은 독보적이다. 그의 신작 '크림슨 피크'도 요정과 난쟁이, 거인 같은 초자연적인 인물들이 나오는 동화와 로맨스가 담긴 고딕 소설을 섞은 스릴러 영화다.

열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망령과 미래에 대한 환영에 시달리는 이디스는 영국에서 온 귀족 토마스와 사랑에 빠진다. 이디스는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토마스와 결혼해 영국의 저택 알러데일 홀에서 토마스의 누나 루실과 함께 셋이 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토마스와 루실의 묘한 관계, 저택에 깃든 유령과 망자들의 경고에 이디스는 점점 건강을 잃는다. 도대체 이 저택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디스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토마스와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야릇한 루실은 친남매이지만 과연 진짜일까라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묘한 관계의 남매에게 갇힌 순수한 이디스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애처롭다. 이때까지만 해도 돈이 필요했던 토마스가 계획적으로 이디스에게 접근해 결혼한 것처럼 보인다.

본격적인 영화의 재미는 토마스가 이디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이디스가 저택 곳곳에 망자들이 숨겨놓은 소품을 찾아 남매의 비밀을 알아가면서 시작된다. 충격적인 남매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욕망과 광기가 휘몰아치는 후반부는 무척 매혹적이다.

또한 우리에게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로 알려진 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어둠에 갇힌 순백 이디스를 아름답게 연기하며, 우울하지만 신비한 느낌의 외모를 지닌 톰 히들스턴은 통제할 수 없는 매력의 토마스를 강렬하게 표현한다. '인터스텔라' '마션'에서와는 달리 섹시한 매력을 발산하는 제시카 차스테인은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힌 루실을 섬뜩하게 연기한다. 또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고딕양식의 저택과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 작품들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과 어울리며 영화의 분위기를 이끈다.

욕망과 순수, 사랑과 광기를 오가는 델 토로 감독의 '크림슨 피크'는 실제 19세기 영국의 고저택을 다녀온 듯한 판타지 스릴러의 세계로 인도한다. 개봉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