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 과부로 지내는 것만으로는 절개가 되기에 부족하다 생각하여, 남편을 따라 죽기를 빌며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뛰어들어 죽거나 독약을 먹고 죽거나 목매달아 죽기를 마치 낙토를 밟듯이 하니, 열녀는 열녀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안의(현 경남 함양)현감으로 부임한 지 2년째인 1793년(조선 정조 17년) 어느 날, 민생 구제에 전력을 쏟고 있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자못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통탄한다. 자신의 한문 단편소설 '열녀함양박씨전'에서다. 안의 출신의 한 여인이 함양으로 시집을 간 지 반년도 안 돼 남편을 잃자 삼년상을 마친 뒤 약을 먹고 자결한 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연암의 시선은 이 여인의 비극적인 삶에도 머물지만, 근본적으로 과부에게 죽음으로 수절할 것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윤리에 꽂혀 있다. 이 윤리는 효력을 다한 양반 중심 사회체제의 일그러진 단면이다. 사연을 전하는 연암의 목소리는 그래서 준열하다. 그 속에는 새 시대에 대한 뜨거운 갈망도 꿈틀댄다. 연암은 어떤 시대를 꿈꿨을까?

■과부 수절은 양반 윤리

먼저, 연암의 소설에 나타난 열녀 박 씨의 사연부터 들어 보자. 안의현 아전의 조카딸인 박 씨는 19세 때 함양군 아전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 신랑은 중증 폐결핵을 앓아 남자구실을 못하는 처지였지만, 박 씨는 조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인을 강행한다. 결국 신랑은 예상대로 변변한 부부생활 한 번 못한 채 숨지고, 박 씨는 시부모를 섬기며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다. 여기까지는 칭송받아 마땅한 열녀의 모습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박 씨가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남편이 숨진 한날한시에 음독 자결한 것이다.

박 씨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연암은 이렇게 짐작한다. "나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길이 친척들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친척과 이웃의 끊임없는 동정과 감시 속에 감옥 같은 생활을 이어가느니 하루빨리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연암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과부 수절은 양반에만 적용되는 윤리라는 것이다.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개가한 여자의 자손은 정직(正職·문무반의 정식 벼슬)에는 서용하지 말라'고 규정돼 있어, 평민 이하 일반 백성은 과부 수절 윤리를 지킬 이유와 필요가 없는 처지라고 연암은 설명한다. 그럼에도 "우리 왕조 400년 동안 백성들이 교화에 젖어 귀하든 천하든 과부로 수절하지 않음이 없어 풍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자손이 정직에 서용되는 혜택을 못 보는데도 지배계층이 강요한 과부 수절 윤리를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따르고 있는 셈이다.

속절없이 독수공방의 세월을 견디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한 많은 삶을 마감했던 숱한 여인네에 대한 측은함 때문일까. 지난 10일 찾은 함양 상림의 역사인물공원에서 본 박씨정려비는 못내 쓸쓸하게 다가왔다. 수원지 가까이 홀로 세워진 나지막한 비석에는 검푸른 이끼가 더께더께 끼었고, 겨울 길목에 선 비석 주변의 나무들은 잎을 거의 떨어낸 채 앙상한 가지만 허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공덕비에 밀린 정려비?

역사인물공원에는 30여 개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역대 경상감사와 함양군수, 안의현감 등 조선시대 지방 수령들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다.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뜻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을 비롯해 '선정(善政)' '인정(仁政)' 등 비명도 다양했다. 박씨정려비가 역사인물공원 뒤편 오른쪽 구석에 자리한 반면, 이들 비석은 공원 전면 양옆을 차지하고 있다. 함양군청이 차별 의도를 갖고 비석들을 배치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려비가 공덕비에 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 박 씨가 조선 지배층의 수절 강요 피해자라는 사실과, 많은 공덕비가 선정 여부와 관계없이 수령이 임기를 채운 뒤 의례적으로 건립됐다는 점에서 씁쓸한 감정을 누르기 어려웠다. 조선 말기 전북 고부군수를 지내며 재산 수탈 등 온갖 악정을 저질러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했던 조병갑(趙秉甲·1844~1911)의 공덕비가 그 속에 포함돼 있어 마음이 더 우울했다. 이 비석에는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하게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쳤으며, 세금을 감해 주고 곧은 마음으로 정사에 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려 비를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병갑은 함양군수 재직 당시 아랫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강요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시민단체와 함양군청 간에 조병갑 공덕비의 철거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으나 지난 6월 존치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함양군청 관계자는 "어두운 역사도 역사인 만큼 존치해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며 "그 대신 조병갑의 악정 사례들을 명시한 안내판을 별도로 세웠다"고 말했다.

연암은 안의현감에서 물러난 뒤 안의현의 유지들이 송덕비를 세우려는 것을 노발대발하며 저지했다. 그 당시 연암은 "공덕비 건립은 나라에서도 금하는 일인데, 만약 추진한다면 하인을 시켜 그 비를 깨부수어 땅속에 묻고 주모자를 감영에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암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연암이 바랐던 과부 재가 허용은 박 씨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1894년이 되어서야 실현된다. 그해 동학농민군이 폐정개혁에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는 조항을 담은 데 이어 같은 해 일본의 강요로 이뤄진 갑오개혁법령에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는 조항이 포함된 것이다. 외세 개입 여부를 떠나 연암을 중심으로 한 선구적인 노력이 여성 자유와 인권 신장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암은 1795년(정조 19년) 음력 9월 20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는다. 경상감사가 관하를 순시하다 가야산 해인사에 묵게 되자, 선산부사·거창현령과 함께 감사를 마중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네 사람은 한동네에서 살았던 친구 사이다. 이들은 해인사에서 시회를 연다. 감사는 각자 율시 두 수를 짓게 한 뒤 연암에게 서문 작성을 맡긴다.

그 서문의 내용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연암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일화를 앞세운다. 남명은 한때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청도 보은에 있는 벗을 방문한다. 마침 그 자리에서 보은현감이던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1506~1559)을 첫 대면한다. 남명은 동주를 보자마자 "형은 내구관(耐久官·벼슬을 오래 하는 관리)이시군요" 하고 비꼰다. 동주는 옆에 있던 친구를 가리키며 "이 늙은이가 붙들어서 그렇게 되었지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렇게 의기상투한 두 사람은 팔월 보름날 해인사에서 만나 밤새도록 민생 문제를 놓고 토론한다.

연암은 이 일화를 시회 참석자들의 경계로 삼는다. "해마다 감사의 행차를 맞아 이 절(해인사)에 들었는데, 하마 세 번이나 감사가 바뀌었으니 나 역시 내구관이라 이를 만하다.(…)매번 절 문을 들어서면 기약 않고도 모인 수령이 늘 일고여덟은 되었다. 절간은 여관처럼 즐비하고 승려는 기생처럼 많으며 모임 자리에서 시를 지으라 재촉하기를 마치 도박에 돈을 걸라고 독촉하듯 하고(…)산수가 절경을 자랑하나 민생 문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 시회에서 연암은 무려 198행에 달하는 오언장시를 짓는다. 해인사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비롯해 관리들의 방문 때마다 수발드느라 고생하는 스님들, 팔만대장경 제작 유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의 전설 등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스님들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가마 떠멘 중 덕분에 험지를 지나는데/두어 걸음 못 벗어나 번갈아 메네/어깨 붉어지고 오목한 홈이 패여 가엾고/시뻘게진 까까머리 박처럼 깨져 버릴까 걱정/허리 쥐고 숨을 한창 헐떡거리고/등에 밴 땀방울 흐르다 말라 버리네/묻노라 너희는 무슨 낙 있어/갖은 고생 다 겪으며 깊은 산속에 사느냐/잡역으로 관가에 종이 만들어 바치고/힘 남으면 사사로이 신도 삼지요/오히려 무서운 건 지나는 나그네들/관의 부름에 나아가듯 빨리 달려간다오'. 억불숭유의 나라 조선에서 스님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시는 '연암집'을 통해 현재 전해지는 42수 가운데 하나로, 명시로 평가받고 있다. 연암은 지나친 과작이라는 지적이 나올 만큼 시를 짓는데 인색(?)했다. 이는 격동의 시대,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상을 리얼하게 담아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보다는 산문이 낫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결과인 듯하다. 지난 15일 혹여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해인사에서 가졌던 관리들의 모임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는지 알아보러 해인사를 찾았다. 아쉽게도 관련 자료를 보지는 못했다. 해인사성보박물관 관계자는 "조선시대 해인사에서 있었던 관리들의 모임에 관한 자료(유가판)가 많지만, 아직 확인 작업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연암 관련 자료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연암은 해인사에서 고운의 전설이 깃든 학사대에도 오른다. '아침나절 학사대에 올라 보니/문창후(최치원)를 만날 것 같구먼 그래/이분이 신선을 하 좋아하여/종신토록 장가 두 번 안 들었다네/도를 얻어 갑자기 하늘 오르니/신발 두 짝 숲 언덕에 버려두었네'. 고운은 신라시대 함양군의 전신인 천령군(天嶺郡)의 태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