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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해남 달마산. 땅끝마을의 수호신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공룡의 등줄기 같은 기암괴봉 능선이 7㎞나 이어져 장관을 연출한다. 해남군 제공 |
- 호남정맥 끝자락 7㎞ 기암괴봉 행렬
- '남도 금강산'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
- 산자락엔 신라고찰 미황사 둥지 틀어
- 정약용 유배 중 교훈 얻었다는 주막 복원
- 다산초당~백련사 800m 고갯길은
- 제자와 사색 나누던 '사유의 길'로 유명…
'끝'을 떠올리면 막막함이 앞선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이란 생각이 굳어질 땐 비장감과 처연함에 휩싸인다. 하나, 이는 한갓 관념일 뿐이다. 지구가 둥글게 돌아가듯, 세상사는 끝이 과정이거나 또 다른 시작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땅끝' 전남 해남과 강진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은 이런 삶의 진리를 증명한다. 해남·강진에 오면 '끝'에 대한 어쭙잖은 편견이 여지없이 깨지는 유쾌한 반란과 전복을 체험하게 된다. 18년의 유배기간 이들 고장에 조선 최고의 사상을 꽃 피우며 근대정신의 씨앗을 뿌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면 '변방'이 '중심'이 되는 창조적 역동성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해남·강진 여행이 특별하고 설레는 이유다.
■땅끝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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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고찰 미황사 대웅전 |
이달 중순 찾은 해남의 고장 안내판에서 눈에 쏙 들어오는 글귀를 발견했다. '땅끝은 희망이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은 땅끝의 마을들과 천년고찰 미황사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달마산 정상(해발 489m)에 올랐을 때 말끔히 씻겨나갔다. '남도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이 딱 어울리는, 장장 7㎞에 걸쳐 펼쳐진 기암괴봉의 행렬은 비상한 예기와 장엄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남도로 내달리던 호남정맥이 땅끝에 이르러 급제동이 걸리면서 반도의 정기를 온축한 뇌수가 분출해 굳어진 것일까. 달마산은 그렇게 땅끝이 결코 '끝'이 아님을, 천덕꾸러기 '변방'에 머물 수 없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달마산의 넉넉한 보살핌 아래 둥지를 튼 땅끝의 마을들과 바다는 평화롭고 활기찼다. 오밀조밀 유연한 해안선을 그리는 만(灣)을 향해 옹기종기 뿌리 내린 마을들에선 평화의 희망가가 잔잔하게 흘렀고, 그 너머로 활짝 열린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은 마을의 희망가를 눈부시게 변주하고 있었다. 달마산 자락에서 1266년의 긴 세월 동안 땅끝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미황사의 미덕과 매력도 각별하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 인도 우전국의 왕이 보낸 불상과 경전을 모시기 위해 지은 이 절은 대웅전(보물 947호)이 특히 인상적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나무 원색에서 풍기는 절집의 고졸한 아름다움은 땅끝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씨를 대변한다. 산스크리트어 문자와 천불도로 장식된 대웅전 내부의 대들보와 천장은 그 미적 가치가 인도 아잔타석굴 벽화나 중국 둔황의 막고굴 벽화에 비견되기도 한다.
■달마산 닮은 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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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
달마산의 미덕은 다산에게서 발견된다. 중앙권력에 주눅 들지 않고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변방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 우뚝한 기상이 그렇고, 이런 과정을 통해 구축한 민본사상이 또한 그러하다. 다산의 유배살이를 더듬어 가다 보면 이를 목격할 수 있다. 다산은 늘 백성에게 눈과 귀를 열어 놓았다. 강진 유배 초기 머물던 주막집 노파에게서 깨우친 교훈이 한 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의 교훈은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니 너무 편파적이 아닌가요?"(노파)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음 태어나게 하신 분으로 나와 있소. 어머니의 은혜도 무척 깊기는 하지만, 탄생되게 하는 근본의 은혜가 더 중요한 탓일 겁니다."(다산)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종자이고, 어머니는 토양입니다.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 베풂이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부드러운 흙의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토양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결국 나무나 풀의 종류는 본래의 씨를 따라서 나뉘게 되는 것이니, 옛날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예를 제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노파)
노파의 반론이 끝나는 순간, 다산은 크게 깨달았다. 남녀평등의 교훈을 노파로부터 얻은 것이다.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 피가 가득/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아 닥친 곤액…'.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해 남근을 절단하는 '애절양(哀絶陽)' 같은 다산의 애민시는 이처럼 백성의 목소리를 새겨들은 민본적 경세관에서 탄생했다.
■사유의 길, 뿌리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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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사유의 길'. 좁은 고갯길로 800m가량 이어진다. 강진군 제공 |
다산을 일깨운 노파가 운영했던 주막집은 현재 복원되어 있다. 다산은 이곳 뒷골방에 사의재(四宜齎)라는 당호를 내걸고 4년 반을 지내며 제자들을 길렀다. 18년 유배기간 다산 밑에서 유학을 공부한 제자는 초당 시절 18명을 비롯해 수십 명에 달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산은 불교계에도 혜장(惠藏) 초의(草衣) 등 수많은 제자를 뒀다. 유불을 구분하지 않는 학문적 통섭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학문공동체가 이른바 '다산학단'이다. 다산은 이들과 함께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해남과 더불어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강진이 근세사상을 낳은 거대한 대학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길이 800m가량의 좁은 고갯길에는 다산과 유불 제자들이 나눈 토론과 사색의 체취가 오롯이 스며 있다. 길 주변에는 동백나무 차나무 상수리나무 서어나무 등 온갖 수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구강포 바다가 보인다. 다산과 제자들은 고갯마루에서 잠시 사색의 끈을 늦추고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도 했다. 제자 중 이 길을 가장 많이 오갔던 이는 한때 백련사 주지로 있었던 혜장이었다. 혜장이 밤늦게 고개를 넘어 불쑥 초당에 들이닥치는 일이 잦아 다산은 늘 방문을 열어 놓곤 했다.
다산과 혜장은 1805년 처음 만났다. 당시 다산의 나이 51세, 혜장은 34세였다. 혜장은 이미 30세에 거찰 해남 대흥사(당시 대둔사)가 연 전국 불법대회를 주재할 정도의 대단한 학승이자 선승이었다. 주역을 줄줄 외는 혜장을 다산은 지식의 허를 찌르는 한 마디의 물음으로 제압했고,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때론 사제로, 때로는 친구로 지내며 6년간 단꿈 같은 세월을 보냈다.
'뜻밖에 만나자는 기별이 오니/희망 넘쳐 마음이 상쾌하였네…내달리는 시내처럼 얘기 나눴지/나는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하고/그대는 화엄 능엄 원각경 얘기/보슬비 허공에서 떨어지고 주고받은 말은 모두 그윽도 해라…' 다산의 시에서 혜장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혜장은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다산의 상심은 컸다. '이름은 중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랐거니/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논어 자주 읽었고/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버리네/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다산의 만시에는 눈물이 흥건히 배어 있다.
■선지식 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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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 |
다산은 빼어난 선지식(善知識)이기도 했다. "실지를 실천하도록 해라(踐蹋實地·천답실지)." 다산이 제자 초의에게 주문했다. "날리는 꽃 제성에 가득하도다(飛花滿帝城··비화만제성)." 초의가 방법을 묻자, 다산은 5언시의 화두를 내린다. 제성에 분분히 지는 꽃잎을 보려면 부지런히 두루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실행 없이 관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다산의 가르침은 정곡을 찌르는 비수와 같았다. 그리고 제자들의 지식 정도와 사고방식, 성격 등을 고루 고려한 눈높이 맞춤형 교육이었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 근(勤) 적(寂)'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성취함이 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 없다. 고요하지 않으면 온전히 정밀하게 하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학문하는 요체다." 초의에게 한 다산의 당부다. 여기에는 다산의 이 같은 학문관과 교육관이 집약되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 해도 학인이 이 세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진리를 터득하기 어려운 법. 해남·강진을 여행한 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여수 향일암에서 그 진리의 일면을 체득했다. 법당에 들렀다가 나가는 길에 기념품 가게 여주인에게 출구를 물었다. 그러나 여주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되돌아와 출구가 없더라고 하니 여주인이 하는 말, "길을 일러 주면 믿고 열심히 찾아봐야지." 다시 가 당혹감을 가라앉히고 세심히 살펴보니 한쪽 귀퉁이에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바위터널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뇌리를 치는 깨달음 하나.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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