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은 한국 영화에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어를 처음 붙인 감독이다. 그는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가 10억 원 미만이던 1998년에 24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쉬리'를 연출하며 6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부흥의 신호탄을 쓴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간 강 감독은 대작들을 연출해 왔다. 사극 판타지의 이정표가 된 '은행나무 침대'(1996)로 데뷔해 '쉬리'에 이어 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 영화 사상 두 번째 천만 관객을 달성했으며, '마이웨이'(2011)에서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줬다.

이렇게 대작의 풍미가 물씬 풍기는 강 감독이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족영화 '장수상회'(9일 개봉)로 관객에게 프러포즈한다. 대작이기는 하지만 극적인 요소가 강했던 이전 작품들을 떠올려 볼 때 '장수상회'가 의아하지만은 않다.

'장수상회'는 70세 할아버지 성칠(박근형)과 그의 마음을 뒤흔든 꽃집 여인 금님(윤여정)의 '특별한' 러브스토리로 관객의 연애 세포를 뒤흔든다. 노년의 어리숙한 로맨스에 웃음을 짓다가 '특별한' 두 사람의 사연에 눈물짓게 되는 것이 '장수상회'의 미덕이다.

'장수상회'를 연출한 강 감독을 설레는 봄바람이 불어오는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대작만 연출하다가 드라마 장르는 처음 메가폰을 잡았다.

▶늘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내 속에 없는 것이 나온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한 것이다. '강제규 감독'하면 대작을 떠올리는 분들에게 '장수상회'는 나와 안 맞는 코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워하고 하고 싶었던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단편영화 '민우씨 오는 날'에서도 그랬지만 1960, 70년대 추억을 서정적으로 그리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특히 초반과 후반에 등장하는 학창시절의 모습이 무척 정겹다.

▶이런 화면, 이런 정서들이 내 영화에서 투영됐으면 좋겠다는 지점이 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장면이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장소 헌팅에 공을 많이 들였다. 스태프에게 소박하게 핀 꽃들이 있고, 우마차가 지나가는 시골 풍경이 떠오를 수 있는 곳을 무조건 찾으라고 했다.

-'장수상회'에는 로맨스 영화이지만 '식스센스'급 반전이 등장한다.

▶반전이 알려지면 부담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편집할 때 보니까 반전을 다 알고 보는 관객도 드라마를 쫓아가는 또 다른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포일러를 막을 때까지 막겠지만 알고 봐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놀이동산의 화장실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떠올린다.

▶그 다큐멘터리를 본 스태프들이 이 이야기를 하더라. 하지만 이 장면이 필요하니까 넣은 것이다. 나중에 회상 장면에서 금님이 병실에 들어갈 때도 같은 노래 불러줘야 해서 중첩되더라도 꼭 필요했다.

-'가슴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돌덩이가 자식'이라는 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영화가 그저 노년의 로맨스 영화였으면 연출을 안 했을 것 같다.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을 하고 가족 간 서로를 돌아보고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 흥행도 기대된다.

▶10, 20대의 젊은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까 걱정했는데, 시사를 해 보니까 소통이 안 되거나 공감을 못 하는 지점이 없어서 다행스러웠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영화에 대한 갈증이 해소됐으면 한다.


# 노년의 로맨스를 연기한 배우 박근형 윤여정

'장수상회'는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노년의 로맨스를 보여준 박근형과 윤여정의 연기가 빛난다. 두 배우는 10대의 떨림과 20대의 풋풋함, 30대의 따뜻함, 중년의 연륜까지 연애의 모든 면을 보여준다.

박근형은 금님 앞에만 서면 무장해제되는 성칠 역을 맡아 기존의 카리스마와 냉철한 이미지를 벗고 풋풋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한다. 그는 고집 센 노신사부터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싱그러운 모습, 데이트를 기다리는 청년의 모습, 사랑에 빠진 성숙한 남자의 모습까지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번지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박근형만의 매력이다. 강제규 감독은 "'꽃보다 할배'를 많이 보지 못했지만, 박근형 선생님의 소년 같은 정서들을 끄집어내면 어떨까 싶었다"고 말했다.

임상수 이재용 홍상수 감독 등 대한민국 대표 감독의 뮤즈에서 강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돌아온 윤여정은 금님 역으로 박근형과 멋진 앙상블을 보여준다. 수줍음 많은 꽃집 여인이지만 성칠에게 먼저 다가가 무뚝뚝한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금님의 캐릭터를 소녀 같은 순수함과 깊은 눈빛으로 완성해냈다. 강 감독은 "기존의 차가운 느낌이 아닌 소녀의 모습을 보았다"며 "기술과 숙련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아니라 윤여정 선생님 내면에 있는 날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