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기분 좋은 겨울 아침. 친정아버지 제사가 있어 해마다 이맘때면 서울 가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정 식구들. 다섯 남매가 한 자리에 다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제각기 결혼해 살다 보니 시댁 챙기랴 직장 다니랴 명절이면 5남매가 한 날 한시에 다 모이기가 영 쉽지 않다. 아무리 출가외인의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 역시 6대종손 맏며느리로 제사를 모셔야 하니 명절에도 친정 나들이가 힘들어 공식적인 5남매의 상봉은 이날이 유일한 셈이다.

부산에서 날아온 성격 잘 맞는 큰딸과 오순도순 수다 꽃을 피우는 것은 친정어머니에게 크나큰 삶의 위안이다. 나이가 들면서 어르신들의 삶의 위안이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 끄덕이며 함께 박수 쳐주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됐다.

팔순을 넘어선 친정엄마는 아직도 바게트빵의 질긴 식감을 즐기실 만큼 건강함으로 동네를 누비시며 노인정에 출근하신다. 어르신들과 가끔 10원짜리 화투도 치시고 서로 손주들 자랑으로 치킨 몇 마리 쏘고 받는 즐거움으로 이어가는 노인정의 문화. 그 안에도 또 다른 사회가 존재한다나!

"말도 마라. 며칠전에는 60, 70 밖에 안된 젊은 것들이 80, 90살 언니들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일을 잘못 처리해서 노인정이 난리가 났었어."

'60, 70밖에 안된 젊은 것'이라는 엄마의 말에 순간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웃지 마, 얘. 노인정에서 60, 70은 젊은 애들이야. 어찌나 자기주장들이 강한지 자기들 멋대로 점심값 3000원씩 받은 걸 싼 재료를 사가지고는 말도 마라. 한 판 홍역들을 치르고…"

기가 펄펄 넘치는 말투로 엄마는 팔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노인정에서 벌어진 스펙타클한 점심값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편 가르고 힘 나누는 권력사회의 한 편 드라마를 본 것 같아 묘한 웃음이 인다. 미생이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싶다.

그들만의 리그는 유치원이든 노인정이든 다를 리 없다. 단합과 담합이 심심치 않게 문제가 되는 건 코흘리개 아이들의 블록놀이 속에서도 팔순 어머니들의 3000원짜리 점심값 사이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편 가르기에 끼어들어 불편하게 눈치보며 그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피곤함도 우리네 사는 일의 한 켠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여기저기 편 안들어. 아무 편도 아니라고. 젊은 애들 맘도 이해하고 언니들 이야기도 잘 들어주거든. 내가 또 분위기 메이커 아니냐. 중간에서 달래주고 챙겨주고 바쁘다 바빠. 넌, 몇시 기차로 내려가?"

팔순의 엄마는 부산 가는 딸내미를 급히 배웅해주시고 부지런히 노인정을 향하신다. 겨울 바람을 가르며 무소의 뿔처럼 무단히 앞을 향해 나아가신다. 우익도 좌익도 아닌 중도파에 서서 우직하게 한 길을 가신다는 친정 엄마는 욕을 먹으실까? 칭찬을 받으실까? 걱정도 되지만 이유없이 웃음도 난다. 사람 사는 모양은 다 매한가지다.

유정임 FM90.5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