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기자 ywlee@kookje.co.kr

- 주인공 꿈꾸는 무명 연극배우 역 맡아
- 박해일 상대 감동의 부성애 연기 펼쳐
- 첫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서 김일성 대역
- 무산 뒤에도 22년간 역할서 못 벗어나
- 촬영 내내 모두들 아버지 생각 많이 해

설경구가 영화 '나의 독재자'(개봉 30일)에서 감동의 부성애 연기를 보여준다. 이번 영화에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나의 독재자'에서 무대 위 주인공을 꿈꾸는 무명 연극배우 김성근 역을 맡았다. 무대 공포증으로 '리어왕' 공연에서 어린 아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던 그는 1972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 대역을 맡는다. 하지만 회담은 무산되고 그는 22년을 김일성으로 산다. 그는 성장한 아들 태식(박해일) 앞에서 명연기를 펼칠 날을 기다릴 뿐이다.

데뷔 이후 20년간 매번 다른 역할을 맡으며 다른 인물의 삶을 살고 있는 배우 설경구. 그는 '나의 독재자'에서는 마치 살아 있는 김일성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그는 "내가 연기하는 인물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을 연기하는 성근'이다"고 말한다. '나의 독재자'는 김일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우리네 아버지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참 어려운 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이자 김일성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김성근은 배우를 향한 욕심 때문에 아들에게 해준 것이 없는 이기적인 아버지다. 나이 먹어도 배역을 받지 못하던 아버지가 하필 김일성 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대통령과 리허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큰 공연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서서히 김일성에 빠져들면서 아들에게도 다가가지 못하고 22년을 김일성처럼 살았다. 성근은 김일성 역에서 못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안 빠져나온 것 같다.

-성근은 처음 무대에 서면서 공포증 때문에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다. 설경구 씨의 첫 무대는 어땠는가.

▶대학 때 무대에 섰는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얼굴에 경련이 생기면서 무서웠다. 대사가 빨라지더라. 대학로 첫 공연이 극단 학전 시절 연극 '심바새매'였다. 연극 시작 후 40분 정도 지나 내가 나가야 하는데, 누군가 선물해준 와인을 다 마신 상태였다. 긴장되니까 술을 마신 모양이다.

-성근이 1972년 보안사에 끌려가 김일성 연기를 연습하는 동안 허 교수(이병준)는 "배우를 잡아먹는 배역, 배역을 잡아먹는 배우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해온 역할 중 스스로를 잡아먹은 배역이 있었다면.

▶잡아먹은 배역은 없고, 잔상이 오래갔던 것이 '박하사탕'의 영호였다. '박하사탕' 때는 촬영 기간 의상을 그대로 입고 다녔고, 그 인물이 밥을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촬영이나 심혈을 기울인 장면은 무엇인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남북 정상회담 리허설 장면이다. 22년간 갈등을 겪어온 아들과 화해의 장면으로 이것을 위해 영화가 달려온 것이다. 이 장면에서 김일성 역을 하다가 갑자기 (22년 전 어린 아들 앞에서 실패했던)리어왕 대사를 해야 했다. 갑자기 바뀌는 것이 관객에게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힘들었다.

-'나의 독재자'를 촬영하면서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나뿐 아니라 이해준 감독이나 박해일 씨도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다. 김성근은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좌절했고, 그래서 김일성 역에 매달렸다. 섬 같은 아버지인 것 같다. 처절하게 외로웠고 잡을 것이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세대의 아버지들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전쟁을 겪었다. 가정을 꾸리고 힘들게 살면서 자신은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은데 자식들은 독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본질도 잃어버리고 살았던 아버지 세대는 결국 자식들에게 뜯어 먹히는 세대다. 찌들어 살면서 자식들을 가르쳤지만 자식들에게 원망의 소리를 듣고….


# 동영상 보고 몸짓 연구…영화 '은교'팀 나서 5시간 특수분장

■설경구, 김일성을 재연하다

- 새벽 1시부터 분장 시작해 아침에 촬영 돌입

영화 '나의 독재자'는 자신을 김일성이라 굳게 믿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 탓에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아들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첫 남북 정상회담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 대역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아버지 김성근 역을 맡은 설경구는 실제 김일성과 흡사한 모습으로 연기했다.

설경구는 먼저 김일성이 등장하는 각종 동영상을 보고 몸짓을 연구했다. 그는 "김성근처럼 나도 자료를 많이 보고 연습했다. 특히 손동작이 많았다"고 말했다. 평양 사투리는 김일성을 만난 적이 있는 사투리 선생님의 녹음 음성을 들으며 연습했다.

자신은 김일성을 연기하는 김성근이기에 완벽한 사투리보다는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역도산'의 일본어, '소원'의 경상도 사투리 때도 녹음을 듣고 연습했다. 현장에 사투리 선생님이 있으면 그분들이 완벽하게 하길 바라기 때문에 연기에 방해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외형적으로는 김일성의 풍채를 보여주려고 살을 찌웠다. 얼굴은 영화 '은교' 때 박해일을 노시인의 모습으로 변신시킨 바 있는 송종희 분장감독이 맡아 촬영 때마다 5시간의 특수분장을 했다. 김일성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닌 설경구가 노인이 되었을 때를 감안해 설경구의 얼굴에 김일성의 외적 특징을 표현했다.

설경구는 "촬영이 아침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새벽 1~2시부터 분장을 했다. 먼저 얼굴에 본드칠을 하고 실리콘 보형물 피부를 붙이고 분칠을 하고 다시 본드칠을 하고 분칠을 하고 다시 피부 조각을 붙이고 분칠을 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보니 땅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분장해주는 사람도 허리가 많이 아팠을 것이다. 박해일 씨는 '은교' 때 10시간을 분장했다고 하더라"며 "다시는 못할 것 같다"고 고개를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