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레바논 감정'의 정영헌 감독을 만났다. 제목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레바논 감정'은 남다른 탄생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감독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거의 2년 동안 칩거하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즈음 최정례 시인의 동명 시집을 읽고 슬픔을 걷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찍어야겠다'는 결심은 창작으로 이어졌다. 시인의 감정이 영화감독에게 어떤 계기가 되어 그 시는 영화로 변형되었고,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의 변화가 관객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힘든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은 갇혀있는 상태에서 발생하고 인물과 정서가 서로 부딪히면서 새로운 파동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에 관한 면밀한 관찰을 포함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 잊고 싶은 과거의 흔적, 사랑이라는 강박증, 자폐와 같은 갇힘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덫이자 인물과 감성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에 넘실대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와 연기자 모두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치열함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기운을 내뿜는다.

내가 놀란 것은 영화에서 발견한 신선함과 장르적인 능숙함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 제작비(후반작업 비용 제외)가 1000만 원 남짓했다는 사실과 감독, 촬영감독, 사운드감독만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감독의 절박함이 영화 제작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는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에서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통 독립영화는 공적인 지원 없이는 제작할 수 없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부산영상위원회의 제작지원금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창작이 힘들다. 시나리오를 쓰고 함께 작품을 할 스태프들을 모으는 과정부터 촬영 기간, 후반작업으로 이어지는 기간, 배급사를 통한 극장 개봉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제작과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투잡 이상의 일을 하는 감독들도 만났다. 하지만 오랜 동료인 그들에게 제작지원금 없이도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개발하고, 자신의 문제건 사회의 문제건 깊게 고민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 질문하고 싶다.

정영헌 감독의 이야기는 비단 서울과 부산이라는 제작 환경의 차이보다 근본적인 지점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관객에게 친근한 이야기로 다가서는 영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를 스크린으로 불러들이는 감독의 성찰이 담긴 영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영역이 공적인 지점으로 확장되어가는 영화,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면한 문제들을 돌파하는 용감한 영화가 현재 부산에서 얼마나 제작되고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렇다. 부산의 감독들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의 형식에 대해,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로 관객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발아의 형태라도 그들이 품고 있던 시간만큼 영화라는 몸을 입을 때까지 단련을 포기하지 않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 창작의 기다림이 영화 안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