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 악양면 하덕마을이 벽화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하동 슬로시티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벽화로, 차의 상징인 다기를 그렸다.

봄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꽃 구경에 나서는 사람들로 전국 각지의 봄꽃 명소는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경남 하동은 남도의 대표적 봄꽃 관광지로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의 십리 벚꽃길은 봄꽃 철만 되면 누구나 가보고 싶은 명소로 손꼽습니다.

그러나 요즘 하동은 슬로시티(Slow City)로 더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느림보 여행'의 대표 장소가 된 것이죠. 슬로시티라는 타이틀에 맞게 느림의 가치를 실천하는 하동은 올해로 슬로시티 지정 6년째를 맞아 더욱 새로운 콘텐츠로 여행자를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하동 악양면은 2009년 청산도 증도 장흥 담양에 이어 우리나라의 다섯 번째 슬로시티로 지정됐습니다. 슬로시티는 '느리게 살기의 미학'을 추구하는 도시를 일컫습니다. 슬로시티 운동의 역사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6년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미국 맥도날드가 이탈리아 로마에 상륙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저항했던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이 운동은 1989년 프랑스 파리 슬로푸드 선언문을 채택하는 계기가 됐고, 1999년 마침내 인구 1만4000명의 이탈리아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치타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 운동이 출범하게 된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 10곳 등을 포함해 27개국 174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가입돼 있습니다.

	경남 하동 평사리공원에 조성된 산수유꽃길을 서한숙 하동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걸었다.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kookje.co.kr

슬로시티 운동은 자연환경과 전통을 잘 보호하면서 슬로(로컬) 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를 지향합니다. 물질의 생산과 빠른 소비, 회전을 지향했던 20세기의 가치를 넘어 21세기에는 삶의 양보다는 질, 성장보다는 성숙, 속도보다는 깊이에 주목합니다. 슬로시티 운동은 바로 이런 느림과 지속이라는 21세기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느림'은 요즘 여행의 화두인 '힐링'과도 궤를 같이합니다. 빠르게만 살아온 삶의 리듬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자는 것이 바로 힐링의 참 의미이자 느림의 미학입니다.

하동 악양면은 차와 문학의 도시를 내세워 슬로시티로 선정됐습니다. 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야생차밭의 다향(茶香), 소설 '토지'로 대표되는 문학도시의 문향(文香), 시골의 향기인 향향(鄕香)의 향취를 자랑합니다. 일부러 가꾸지 않은 자연의 선물이면서 '왕의 녹차'로도 불리는 하동 녹차, 소설 '토지'의 생생한 현장, 비닐하우스 하나 없이 햇빛과 신선한 공기로만 농작물을 키우는 악양. 그 자체가 슬로시티의 가치와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하동은 최근 남도해양관광열차 'S트레인'의 운행 덕분에 부산에서 여행하기 더욱 수월해졌습니다. 매일 한 편씩(월요일 제외) 운행되는 이 열차는 부산에서 여수까지 남도의 도시 곳곳을 연결합니다. 특히 이 기차는 봄꽃 철을 맞아 상춘관광을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매주 주말이면 만석을 이룹니다. 벚꽃도 볼 겸 S트레인을 타고 부산에서 2시간30분 거리의 하동으로 '느림보, 힐링 여행'에 나섰습니다.


◇茶香 文香 나는 '토지' 속으로

- 부산역서 S트레인 타고 2시간30분 거리 하동역 도착

- 빛나는 백사장 평사리공원 거쳐 화개장터까지 섬진강 따라 걷는 여유

- 최참판댁 사랑채서 내려다보는 소설 '토지' 무대 악양벌판도 운치
- 매암차박물관 하동녹차 체험도 좋아

- 벽화 하덕마을 '공공미술 프로젝트', '이야기민박' 마을 등 슬로시티 면모

경남 하동은 봄꽃을 보며 천천히 쉬어가는 여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2009년 국제슬로시티연맹이 하동을 슬로시티로 지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한숙 하동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경남 하동 악양면 슬로시티로 '느림보 여행'을 떠났다.

■여행 시작은 기차

	S트레인 다례실에서 하동녹차를 체험하고 있는 여행자들.

자가운전을 해서 경남 하동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느림보 여행'이라는 주제에는 대중교통이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하동 슬로시티 여행을 떠났다. 코레일은 지난해 9월부터 부산~여수엑스포 구간을 오가는 남도해양관광열차 S트레인을 운행하고 있다. 부산역에서 오전 9시19분 출발해 여수엑스포역까지 가는 열차로 하루 한 편 운행된다. 하동을 여행하려면 중간역인 하동역에 내리면 된다. 하동 도착시각은 오전 11시43분이며, 저녁 부산으로 향하는 하동발 열차 출발시각은 오후 7시24분이다.

기차는 일반 객실과 식당, 다례실, 노래방실, 자전거 거치대실 등으로 나뉘어 있어 돌아다니며 속속들이 구경하는 것도 큰 재미다. '코스모스역'이라 불리는 중간역인 북천역에서는 열차가 5분 정도 정차하기 때문에 내려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S트레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다례실이다. 22석의 좌식 다례실은 지역 특산품인 하동녹차를 마시며(5000~7000원) 다도의 고장 남도를 체험할 수 있다. 녹차를 내리는 법, 우린 녹차를 담는 법에 대한 다례실 김정화 매니저의 설명을 들으며 하동녹차와 다식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하동역에 도착해 있었다.

■모래톱 따라 걷는 즐거움

하동역에 내려 평사리공원으로 향했다. 평사리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로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곳이다. 하동 악양면에는 '토지길'이 조성돼 있는데 평사리공원은 이 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3만4000여 ㎡ 규모의 공원이 섬진강 모래톱을 따라 길게 조성된 것 자체가 볼거리다. 넓은 백사장을 걸으며 재첩잡이 배를 볼 수도 있다. 공원 입구에 놓여 있는 나룻배는 이곳이 하동읍과 화개장터를 오가는 물목인 개치나루터였음을 말해준다. 평사리공원은 캠핑장으로도 유명했으나 관리 문제로 현재는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공원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개나리 매화 산수유 벚꽃 등 봄꽃을 체험할 수 있다. 강 건너 전남 광양과 구례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걸을 수도 있다. 현재 하동군은 하동역에서 하동 송림공원과 이곳 평사리공원을 지나 화개장터까지 이어지는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를 조성 중이다. 완공되는 이달부터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화개장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느리게 여행하기'의 또 다른 콘텐츠가 될 전망이다.

날 좋은 봄이라 그런지 평사리공원 하늘에는 패러글라이딩 족이 유독 많이 보였다. 저 높이 보이는 하동 형제봉과 구재봉이 패러글라이딩 명소라고 한다. 두 봉우리 활공장에서 날아온 패러글라이더들이 평사리공원 모래톱에 속속 내려앉았다.

■'토지'의 고향

	악양면 최참판댁.

평사리공원을 거쳐 슬로시티의 고장 하동 악양면에 들어오면 평사리 전망대부터 먼저 들르는 게 낫다. 평사리 너른 들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다. 평사리 들판과 동정호, 호수 옆 악양루,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는 부부송의 장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악양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전투를 치를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곳 평사리 호수를 보고 중국 악양의 동정호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계속 위로 올라가면 백제와 신라의 경계선이 됐던 고소산성이 나온다.

하동군이 2002년 만든 최참판댁과 아래 초가마을은 악양면의 인기 관광명소다. 소설 '토지' 속 영남 대지주 최참판댁을 형상화한 이곳에서는 매주 볼거리가 이어진다. 소설 속 윤 씨 부인 역할을 하는 인물을 매주 주말마다 안채에서 만날 수 있다. 또 이달부터 11월까지 주말(공연 일정은 하동군 문화관광과 055-880-2363으로 확인)에는 '평사리가 들썩들썩 최참판댁 경사 났네' 마당극도 펼쳐진다. 최참판댁 뒤편 초당으로 가는 길, 누런 황죽의 대나무숲도 신기하다. 최참판댁 바로 아래에는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이 된 초가집 세트장이 나온다. 매화꽃에 취해 초가마을 여기저기를 순례하면서 공방과 차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원에서 하동녹차 체험을

	악양면 매암차문화박물관 내 매암찻집.

'녹차의 고장' 하동은 차를 전면에 내세워 슬로시티로 지정받았다. 그만큼 차 체험은 하동 슬로시티 여행의 필수 코스다. 악양읍 내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는 하동 차의 역사와 다원, 차 체험을 할 수 있다. 하동 다원 8경 중 하나인 매암차박물관에 들어서면 2만3000여 ㎡ 규모의 너른 평지에 형성된 차밭이 보인다. 하동의 다른 다원들은 모두 산기슭에 있는데 이곳은 평지에 조성된 게 특징이다. 녹차는 곡우(4월 20일)를 전후해 잎을 따고 덖으며 건조해 만든다. 곡우가 다가와서인지 찻잎은 푸름을 더한다.

차박물관은 다다미방의 낡은 녹조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때 수목원의 관사로 사용된 건물이란다. 다원 한 쪽에 마련된 매암찻집에서는 테이블에 놓인 여러 종류의 차를 마음껏 즐기고 2000원만 내고 가면 된다. 저렴한 대신 다기 설거지와 테이블 정리는 여행자가 직접 해야 한다.

■벽화마을·이야기민박

하동 슬로시티는 올해 새 사업을 추진 중이다. 악양면 마을 곳곳에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펼치는 것이다. 오는 8월 15일 개관하는 하덕마을의 골목길 갤러리 '섬등'은 마을 할머니들을 스토리텔링화한다. 특히 악양면이 고향인 위안부 고 정서운 할머니를 기리며 '여자의 일생'을 갤러리와 벽화를 통해 보여준다. 벽화작업은 이 같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올 연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입석마을에 조성된 이야기민박.

지역민이 직접 참여하는 슬로시티 사업은 또 있다. 입석·매계 등 4개 마을에 조성되는 '이야기민박'이 그것으로, 다음 달 1일부터 운영을 시작한다. 자기 집과 마을회관 등에 조성한 이들 마을의 이야기민박은 1인당 1만 원에 이용할 수 있다. 취사가 가능하도록 주방시설도 싹 바꿨다. 마을에 묵으며 차 마시기, 목공예, 천연염색, 찻잎 따기, 밤 줍기 등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에 알맞다. 이야기민박 예약은 매계마을(055-883-8439), 입석마을(011-883-3229), 차 이야기 민박(010-3886-9966), 청년농부 이야기 민박(010-8539-2812) 등에서 받는다.

이와 별도로 코레일은 자유여행패스인 '내일로'를 구매하는 부산 울산 경남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이곳 이야기민박에 묵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개인 이야기 또는 마을의 민속사, 풍속사를 채록하거나 일손을 도와주면 민박비와 식비 등 2만5000원을 지원하는 사업을 다음 달부터 벌일 계획이다.

강동오 하동 슬로시티 프로젝트 매니저는 "올해로 6주년을 맞은 하동 슬로시티의 이번 새 사업은 외부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쁘게 마을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을 외부와 소통시키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협조=코레일


# 맛집과 교통편

- 재첩 국·회무침·파전·참게장 '한 상'
- 벚꽃 철에 가장 맛난 벚굴도 제 맛

- 코레일 카셰어링 서비스 예약 이용
- 동정호 인근 무인자전거 대여 가능

하동의 대표 음식은 재첩이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하동의 명물이다. 하동재첩특화마을 내 섬마을(055-882-3580)은 재첩 전문점이다. 이곳 조영주 대표가 직접 배를 타고 나가 잡은 재첩으로 재첩국과 재첩회 등의 요리를 손님상에 올린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재첩 한 상(사진)으로 재첩국과 재첩회무침, 재첩파전, 참게장 등이 나온다. 담백한 재첩국과 새콤달콤한 회무침, 고소한 재첩파전, 일곱 번의 제조과정으로 비린 맛을 없애고 짭조름한 맛을 살린 참게장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참게 역시 하동에 가면 꼭 맛봐야 할 진미 중 하나다. 요즘 식당에서는 제철을 맞은 벚굴요리를 찾는 손님들도 많다. 섬진강에서 나는 굴인 벚굴은 벚꽃 철인 이때가 가장 맛있다.

기차역에 내려 하동 시내를 둘러보려면 차가 필요하다. 이에 코레일은 하동역에 카셰어링 서비스를 운영한다. 유카(http://www.youcar.co.kr) 회원등록 후 멤버십카드를 발급받아야 이용할 수 있으니 여행 1주일 전에 예약을 하는 게 좋다. 자전거를 이용하고 싶다면 하동 악양면 동정호 인근의 무인자전거 거치대에서 대여할 수 있다.

글=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사진=백한기 선임기자 baekhk@kookje.co.kr

	평사리공원에 조성된 대나무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