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갑던 여름 햇살이 비켜나간 자리에 황금 들판이 펼쳐지는 시기다. 그런데 최근 전남 해남군 일대 간척지에서는 움직이는 시커먼 물체들이 대규모로 출현해 농민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늘의 장본인은 다름 아닌 풀무치의 약충이었다.
풀무치(Migratory Locust)는 메뚜기목 메뚜기과 풀무치속에 속하는 곤충으로, 우리나라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풀무치는 1년에 한 번 번식을 하며, 짝짓기 후 암컷은 긴 삽 모양의 산란관을 땅속 깊숙이 밀어 넣어 여러 개의 알주머니를 낳은 뒤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듬해 초여름에 깨어난 풀무치는 7~10월 사이에 성충으로 자랐다가 다시 번식을 하고 생을 마감하는 일생을 반복한다.
알에서 깨어난 풀무치 유충은 몇 번의 탈피 이후 번데기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충이 되는 불완전 변태를 한다. 이렇게 불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들의 유충을 약충(nymph)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들의 유충은 크기만 약간 작고 날개가 온전하지 않을 뿐 겉모습은 성충과 거의 유사하다.
원래 풀무치는 '풀'+'묻히다', 즉 풀 속에 묻혀있는 듯 보인다는 이름처럼 초록색을 띤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알들의 부화율이 높아져서 약충과 성충들의 개체 밀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몸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색이 변하고 군집을 이룬 풀무치는 황충(蝗蟲)이라고 해서 이름도 달리 불린다. 풀무치는 단독 생활을 할 때는 몸빛이 녹색이지만, 군집을 이루게 되면 몸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식욕이 증가한다. 보통 황충 무리는 적게는 수십 억에서 많게는 수천 억 마리의 개체수를 자랑한다. 이들 각각은 하루에 자신의 몸무게의 2배에 달하는 양을 먹어 치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충의 출현은 오래 전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1784년 남아프리카에서는 3000억 마리의 황충이 3000㎢ 농지를 초토화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이들의 행동 패턴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졌다. 그 중 호주 시드니대학 연구팀은 황충의 변신을 유도하는 트리거 포인트(Trigger point, 연쇄 반응을 유인하는 촉매제)가 바로 '밀도'라는 것을 알아낸 바 있다. 이들은 개체수가 적고 밀도가 낮을 때는 각자 행동했으나, 점점 개체수가 늘어나 이들의 밀도가 1㎡당 20마리가 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식욕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로 인해 연구자들은 1㎡당 20마리의 개체 밀도가 이들의 '임계(臨界)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임계 포인트를 넘어가면 이들의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영국 옥스퍼드대학 연구팀은 메뚜기과에 속하는 사막메뚜기를 연구한 끝에, 이들이 사는 곳이 유난히 건조해지면 먹잇감이 부족해진 메뚜기들이 아직 먹을 만한 풀이 남아 있는 장소로 이동하다가 한 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거나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접촉이 이뤄지면, 이것이 자극제가 되어 체내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평소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로토닌은 인간의 뇌에서도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또 연구팀은 사막메뚜기의 숫자가 임계 전환점을 넘어가도 세로토닌 분비를 억제하는 약물을 이용하면 이들이 비교적 온순한 단독형 메뚜기로 남아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규명했다. 그리고 개체수가 임계 전환점을 밑돌아도 세로토닌을 외부에서 주입하면 집단을 이루고 황충의 특성을 보이도록 변모한다는 점도 발견했다.
최근 몇 년 새 황충의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 큰 재앙의 전조가 아닌지 의심이 들게 한다. 이들의 개체 수 증가의 원인으로는 마른 장마로 인해 알의 유실이 감소돼 부화율이 높아진 것과 친환경 농법의 확산으로 곤충의 생존 조건이 좋아진 것, 천적인 새들의 개체수가 줄어든 것 등이 지목되고 있다. 원인 파악과 그에 대한 대비책이 불명확하다면 앞으로 이들이 또다시 출현할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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