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보석함에 진분홍 보석이 살짝 얼굴을 내민다. 평화공원에서 만난 사과 꽃 몽우리의 모습이다. 동백 매화 벚꽃 목련꽃이 함께 피었다 미처 지기도 전에 복사꽃 배꽃 앵두꽃 사과꽃이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꽃대궐이 따로 없다. 이처럼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면 사람들의 마음도 들뜨고 들뜬 마음을 따라가던 몸은 피로가 누적된다.

며칠 전 내원한 40대 남성에게서도 진분홍 꽃 몽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의 진분홍은 애처로웠다. 그는 택배 일을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분주히 다녀야 한다. 무거운 물건도 많아 힘이 들지만 깨지기 쉬운 물건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농수산물은 신선함이 생명이라 신속히 배달해야 한다.

기온이 높아지니 땀이 많이 나고 이와 비례해 피로도 한층 쌓여만 갔다. 지난 주말엔 일과 후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항문 주위가 아프고 붓기 시작했다. 항문 샘이 곪아 항문주위농양이 발생한 것이다.

항문 샘은 분비물을 내보내 마찰을 줄여주며 상처가 나지 않고 배변하게 한다. 항문 입구가 많이 긴장돼 있으면 분비물 배출이 잘 안 된다. 몸이 피곤하고 면역력이 낮아질 땐 고여 있던 분비물에 염증이 생긴다. 점점 고름 양이 많아져 주위 조직을 압박하게 된다. 통증을 느끼고 항문 주위가 붓는다. 삶을 아주 끈질기게 참아가며 분주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직한 사람들에게 자주 발생한다.

항문주위 농양은 처음엔 사과 꽃 몽우리처럼 진분홍색으로 작은 구슬만하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커지고 색이 짙어져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큰 농양으로 발전한다. 몽우리가 커짐에 따라 전신 증세가 발생한다. 전신 무력, 열, 몸살 증세 등의 균혈증 증세가 있고 방치하면 패혈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항문내시경술과 항문초음파 검사로 쉽게 진단 가능하다. 국소마취 후 간단하게 절개배농술을 한다. 진분홍 농양을 절개하면 희거나 크림색의 고름이 나온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척추마취 후 절개배농할 수 있다. 이때는 염증이 시작된 항문 샘의 내공이 30% 정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내공이 발견되면 한 번에 근원적인 수술을 할 수 있고 완치율도 높다. 내공이 발견되지 않으면 계속 고름이 나오는 치루가 발생된다. 치루는 다시 수술해야 한다.

햇볕을 많이 쪼인 쪽에서는 진분홍 꽃 몽우리에서 사과 꽃이 터져 하얗게 피었다. 몸을 웅크리고 겨울을 견디며 준비해왔던 회한이 핀 것 같다.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휴'하고 한숨 짓듯 안도의 순간을 맞는다. 인생도 그렇다. 고난을 이겨내고 정점에 이르면 '휴'하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그날 환자는 간단한 수술을 받고 '휴'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웃었다.

신명철 한마음항외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