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책을 한 권 보냈으니 인터뷰에 참고하라는 이야기다. 우리 방송의 특성상 외국의 저명인사들과 인터뷰할 기회가 참 많은데 며칠 뒤에 도착한 책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큰 매력을 느낄만한 그런 책이었다. 저자를 보니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 미국이름보다 한국이름으로 더 낯익은 그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한 뒤 현재는 서울 모 대학에 재직 중인 존경받는 학자다.

낯익은 이름 앞에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니 몇 년 전 관심있게 눈여겨본 그의 책이 떠올랐다. 한국에 살면서 느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모아 책을 냈는데 한국의 인문교육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교육의 현실에 몇 가지 대안까지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그 제목 앞에 발길을 멈췄었는데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책이었다.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사색의 가을로 들어서는 요즘, 아이들은 어느새 부쩍부쩍 자라서 코흘리개를 벗고 10대 후반에 들어서고 있다. 곧 부모의 품을 벗어날 아이들의 속절없는 성장 앞에 나는 책 제목이 주는 교훈을 이제야 다시 한 번 곱씹으며 부모 노릇을 점검한다.

엄마가 된 이후 나의 육아는 과연 '방향'이었을까? '속도'였을까?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뛰길 원했고 더 잘하길 바랐으며 더 많이 나아가길 응원했다. 앉을 새도 없이 헉헉대는 아이에게 더 빨리 날아다니라고 등 떠밀어 부담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전쟁 같은 시간 속에 앞을 볼 새도 없이 아이를 키우다 멈춰보니 아이의 삶의 방향에 나는 얼마나 진지했던가 이제야 퍼뜩 정신이 든다.

처음 자전거를 탔던 순간을 기억한다. 앞을 제대로 보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나서 서서히 페달을 돌리면 속도는 저절로 따라왔다. 그러나 멋모르고 페달만 열심히 밟다가 가속도가 붙었을 때 그제야 핸들을 틀어가며 방향을 잡다가는 길거리에 패대기쳐지기 일쑤였다.

속도는 순간에 붙지만 방향은 순간에 설정되지 않는다. 방향 없이 뛰다가 속도가 붙으면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경험하기 쉽다. 아니다 싶어 멈추려 할 때는 이미 늦어버린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시간이 억울하고 분하다. 자존심도 상한다. 이런저런 이유가 발목을 잡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그냥 가야만 하는 일이 흔하다. 간 길을 되돌리기란 누구나 쉽지 않다. 애들 말대로 얼굴이 팔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속도전이 주는 뒤늦은 후회의 참담함을 알기에 나는 아이들이 곁을 떠나기전 나의 부모 노릇에 두려운 제동을 걸어보려 하는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는 발버둥으로 말이다.

빠른 속도로 방향키 한 번 재부팅할 시간 없이 달려왔다면 이제는 곁을 떠나기 전 아이의 잡은 손을 놓고 잠시 멈춰 진정한 부모 노릇을 돌이켜보리라.

가뜩이나 한 번 간 길도 제대로 못 찾는 방향치인 내가 어찌 아이의 방향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아이의 인생은 결국 내 몫이 아닌 것을.

유정임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