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기본기를 잊고 살 때가 많다. 코흘리개도 아는 당연한 세상 이치를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이다. 빨강 신호등 앞에서 무단횡단은 금물이라거나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것은 나쁜 일이라거나 다른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는 일은 안 해야 한다거나 삶에 있어 아주 기초적인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사는 일 앞에서 그렇게 기초적인 사실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진실이야말로 무한감동으로 다가온다. 호화스럽게 덧붙이거나 치장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포장을 하거나 둘러대지 않아도 그저 진실이 주는 감동은 시큰한 전율을 선사한다.

서울 출장길에 지나치게 된 어느 팥빙수 가게. 홍대 입구에서 취재를 끝내고 보니 오후 3시쯤. 날은 덥고 갈증은 심하고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 생각나던 차에 깔끔하게 손글씨가 쓰인 가게의 간판 하나가 시선에 들어온다. 초록색 칠판 모양의 입간판에는 간결한 한 문장이 적혀 있다. "아버지께서 다시 팥을 보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달랑 쓰인 한 줄의 글. 그 한 줄이 글이 나를 멈춰 세웠다. 글 속에 '아버지'가 보였다.

흉년이 들어 자식에게 보낼 튼실한 팥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지난해, 아버지는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여름은 그렇게 흘러갔고 아버지의 일 년은 더 한 갈증으로 열렸으리라. 온 정성을 쏟아 부은 팥 농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건강한 국산 팥종자를 찾아 아버지는 바쁜 발품을 팔았으리라. 종자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며 땀 흘린 농사로 다시 일 년을 보내고 튼실한 팥을 탈곡하며 아버지는 내내 자식의 안부를 떠올리셨을 것이다.

자식의 가게로 한달음에 올라온 아버지의 팥. 흉년을 딛고 다시 자라준 아버지의 고생이 서린 팥. 아버지께서 다시 보내주시기 시작한 팥은 아버지의 기쁜 눈물이요,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소리 없는 정성이다.

간판의 글은 아버지의 고생을 자랑하지 않았다. 정성 들인 팥의 달콤함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속내가 튼실한 진짜 국산 팥이라고 생색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미사여구 하나 없는 그 간결한 한 줄 문구 앞에 나는 잠시 생각을 놓았다. 아버지께서 다시 보내주신 팥으로 만들었을 팥빙수는 먹지 않아도 가슴이 배불러 왔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옆자리에 앉은 작가는 최근에 본 TV 프로그램을 설명하느라 바쁘다. 모 프로그램이 만든 스타 선생님 특집에서 화제가 된 사람이 있었다나. 전국의 유명한 선생님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한 선생님은 화려한 언변이나 시선을 끄는 잘 생긴 외모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제스추어를 보인 그런 분도 아니었단다. 반 아이 모두의 번호와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 부르던 스승의 진심. 스승으로서 당연했을 그 모습 앞에 모두는 감동했다.

거창하지 않은 기본의 진실을 다시 생각하자. 당연한 기본조차 종종 까맣게 잊고 사는 속물근성의 때를 뽀득뽀득 소리 나게 닦아내자. 맑은 감동이 있을 때 세상은 정작 견딜만하다.

유정임 부산영어방송 편성제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