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진료실은 아이들로 활기가 넘쳐난다. 이미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이 발산하는 생기와 뚜렷한 개성은 시끌법적한 휴식시간의 교실을 연상케 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성장이 훨씬 빨라졌다. 2차 성징(남자는 고환 부피가 4mL 이상, 여자는 유방 발달)의 출현 또한 앞당겨졌다. 2차 성징의 발달이 남자는 만 9세, 여자는 만 8세 이전에 일어나면 사춘기 성조숙증이라고 한다.

사춘기는 신체 급성장, 정신적 변화 등이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진료실에서 흔히 듣는 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사춘기에 든 것 같아요?" 사춘기 성조숙증의 진단 기준에서 핵심 사항은 2차 성징의 확실한 변화와 나이이다. 또 중요한 점은 남자의 사춘기 진입이 빠를 경우는 뇌병변 가능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조숙증을 가진 아이들의 대부분은 같은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체중도 많다. 1~2년 정도를 일찍 성장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사고력이나 행동의 성숙도는 반드시 사춘기 상태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사춘기가 왔다는 것은 개인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사건이다. 무한히 잠재되어 있는 본성의 자기화가 이제 막 싹을 틀려는 시기다. 아무도 몰랐던 개인의 고유한 능력이 본격적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시기이다.

짧은 진료시간이지만 나는 이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지다고 느낀다. 이미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스로를 엮어 놓고 그 속에 갇혀 살아가는 이른바 사회생활이라는 껍질 속에서 나를 충분히 자유롭게 풀어 놓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이 아이들로부터 '삶'이란 것을 배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들이 순간적으로 던지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삶'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 있기도 하다. 가녀린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화사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아이들은 어쩌면 내가 본 받아야 할 사회생활의 자세일 지도 모르겠다.

대다수 부모님들은 자녀의 이런 저런 행동이나 말투, 학교 생활의 시시콜콜한 내용들, 스마트폰, 컴퓨터 게임 그리고 성적 등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부모님 말씀에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진료실에서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2~3년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들은 이런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있음을 느낀다. 다만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에 그냥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사춘기는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이며 누구나 겪게 되는 매우 소중한 통과의례이다. 나도 아이들로부터 지적받는 일들이 적지 않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개선의 기미가 없다. "선생님도 독수리 타법이시네요…저거 오타인데요." 아이들은 부모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정우영 인제대 부산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