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교류학 개척 정수일 유작
- 외국 이론 무작정 의존 지양
- 다양한 동서고금의 자료 바탕
- 평생 연구한 정수 농축해 담아

지난 2월 91세로 세상을 떠난 석학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쓴 생애 마지막 책 ‘문명교류학’이 출판사 창비에서 나왔다. 대학자 정수일은 ‘문명교류학’을 엄연하고 중요한 학문 분과로 정립하는 데 온 힘을 다 썼다. 858쪽에 이르는 이 두꺼운 저서는 그런 저자가 일구고 가꾼 학문 세계의 정수를 농축해서 담은 성취로 다가온다. 동시에 그의 평생 염원 또한 이 책에서 진하게 느껴진다. 책머리 ‘여는 글’이 인상 깊다.

스키타이 전사를 그린 옛 그림. 유목 기마 민족 전사 집단이었던 스키타이인은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창비 제공

“졸저는 복합적 학문으로서의 문명교류학에 관한 개론적 요지를 엮은 초유(初有)의 개설 총서이며, 30여 년간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과녁으로 삼아 출간한 저서와 발표한 논문의 고갱이를 집대성한 학술모음집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문명교류론이 학문의 반열에 떳떳이 자리한 유례는 아직 전무한 형편이다.” “문명교류학 개설서의 출간이 절박한 시대적 요청인 데다가 후반생의 명운을 걸기로 작심한 숙명적 연구 과제라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한국의 지식·학문 풍토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서문이 아닌가 싶다. 자잘하지 않고, 옹색하지 않으며, 외국 이론·학문을 무작정 수입하려 들거나 거기에 기대려는 관점도 아니고, 대책 없이 난해한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세계를 종횡하며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소화하고 사유한 끝에 세계에 통하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자 나선 대범함·창의성·깊이가 있다.

저자가 평생 펴낸 문명교류사·문명교류학 관련 책은 참으로 많다. ‘신라·서역교류사’ ‘실크로드학’ ‘실크로드사전’ ‘고대문명교류사’를 비롯해 수십 권이다. ‘기초아랍어’ 등 극소수를 빼면, 모두 문명교류가 주제다. 그는 제1회 문무대왕 해양대상(해양문화 부문), 제5회 세계실크로드학회 국제학술대회 최우수논문상,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학술 부문), 제42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번역 부문) 등 상도 많이 받았다.

저서 ‘문명교류학’은 이런 저자 스스로 ‘고갱이’(핵심)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을 추렸다. 읽다 보면, 저자가 가져다 쓰는 동서고금 자료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하다는 데 먼저 놀란다. 이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대학원생과 연구자를 위한 기본 교재 성격으로 쓴 책이 ‘문명교류학’인데,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도서 구실도 충분히 할 듯하다.

저자가 강조하는 개념과 쟁점이 여럿 있다. 저자는 문명교류와 문화교류를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문명교류란 이질문명권 간의 교류다.”(96쪽) 예컨대 서로 다른 문명권인 유교(한자)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이 서로 교류했다면 그건 ‘문명교류’다. 그런데 유교(한자)문명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나라가 교류했다면 그건 ‘문화교류’다.

그는 문명의 3대 속성을 “자생성·모방성·공유성”으로 규정해 가닥을 잡는다. 문명교류의 개념 또한 “구성요소를 달리하는 문명(이질문명) 간의 상호 전파와 수용의 과정을 말한다”(137쪽) 등으로 간략히 정리해 관련 논의가 앞으로 갈 수 있게 돕는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세계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문명교류학 연구가 답보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데,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관한 호된 비판 등도 그런 인식을 반영한다.

이 대목도 무척 중요하다.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실크로드의 시·종점도 변화해 왔다. …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었으며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다.”(460쪽) 이런 증명을 바탕으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로를 로마-장안 구간이 아닌 로마~신라 금성(경주)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분량이 매우 많고, 한자어·옛날식 표현 등이 자주 나와 읽기에 만만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