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의 붓끝은 어지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1945년생 극작가·연극평론가·소설가·동화작가 김문홍(사진)이 새 소설집 ‘설야행’(도서출판 전망)을 냈다. 올해 80세가 된 작가 김문홍은 이 작품집에서 간결한 서술로 선명한 장면을 그려 복잡하지 않은 서사를 펼쳤다. 연극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단순함이란 이것저것 걸릴 만한 것을 무심한 듯 쳐내야 닿을 수 있다. 이런 단순함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설명이 부족해 모자란 듯, 심심한 듯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는 반긴다. 애면글면하며 써 내려가기보다 툭 툭 던지는 듯한 전개와 문장 나름의 맛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49년 전인 1976년 제1회 한국문학신인상 중편소설 당선 등으로 등단해 소설·희곡·평론 분야에서 책 60여 권을 낸 작가 김문홍은 ‘설야행’에서 단순미가 느껴지는, 복잡하게 꼬이지 않은 이야기를 택했다. 이는 그의 예술 인생에서 비중이 가장 큰 연극·희곡 부문 특징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실시간으로 상연되고, 한 번 지나가면 되감아 다시 볼 수 없는 연극은 ‘바로 그 순간’ 관객 뇌리에 먹혀야 하고 그러자면 일정한 단순함·선명함을 과감히 택해 희곡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설야행’에는 단편 6편, 중편 1편이 있다. 역사·옛이야기가 배경이 되는 작품으로 ‘귀’(삼국유사 속 신라 설화) ‘이옥·李鈺’(조선의 괴짜 선비 이옥) ‘설야행·雪野行’(조선의 괴짜 화가 최북) ‘사초·史草’(조선 연산군 때 사관 이야기)가 있다. ‘눈길’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 짙은 소설이다. ‘달밤’은 한 소년의 기구하고 아름다운 가족사를 담았고, ‘모텔 파라다이스’는 현대 사회 욕망 난맥상을 그렸다.

‘이옥’은 간명하게 다가드는 연극을 객석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안긴다. 실존 인물인 선비 이옥(1760~1813)은 조선 후기 명분과 관념에 찌든, 개성 없는 문장에 반발해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문체를 창출하고 고집하다 기꺼이 불우함을 택했다. “(이옥은) 나는 요즘 세상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사대부 문체가 웬 망발이며, 도덕군자의 문체가 무슨 소용이나며… 끝까지 자신만의 문체를 고집했었지요.” “모든 개별적인 것은 나름의 존재의미를 갖는다고 소신은 생각하옵니다.” 작품에서 이옥은 선명하게 직진한다.

조선 화가 최북이 주인공인 ‘설야행’ 등에서도 작가의 예술관을 느낀다. ‘눈길’ ‘달밤’의 서정성도 인상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