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문학의 권위자 심경호 교수
- 조선시대 유산록 65편 엄선
- 등산 뒤 남긴 문학엔 풍류 가득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은 후 새끼로 동여매고서 길을 갔다. 그리고 봄추위를 대비해 두터운 솜옷을 준비했다.” 1611년 봄, 유몽인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지리산 등반 준비 옷차림이다.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스틱을 들고 나서는 현대인과 다른 듯 비슷하다.

지리산 능선에 운무가 몰려왔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국제신문 DB

1579년 9월 가야산을 올랐던 정구의 ‘유가야산록’에는 비상식량 이야기도 나온다. “도은사에 가다가 쉴 때 일행 중 한 사람인 김면이 아이에게 작은 통을 가져오라고 시키더니, 밤을 쪄 가루로 만들어 꿀과 섞어 환약처럼 만든 것을 꺼냈다. 여러 날 동안 싸매 둔 탓에 쉬어서 냄새가 고약했다. 길을 나설 때 집사람을 시켜 산중에 별미로 먹으려고 그것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밤중에 김면은 율무죽을 쑤었다.” 비상식량을 준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 시대 선인들은 산놀이에서 일어나는 감흥을 시와 산문으로 적어 유산록(遊山錄)으로 남겼다. 길 떠나기 전 준비과정, 산 풍경의 세세한 묘사, 자연을 대하며 느끼는 감동까지 일일이 적었다. 국토 3분의 2가 산인 나라의 국민이라 등산을 취미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옛사람의 산행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걸로 등산의 추억을 남기는 것이 대부분인 현대인에 비해 그들의 ‘유산록’이 더 멋져 보인다. 등산의 즐거움과 감동이 넘쳐난다.

‘산문기행’은 한문학의 권위자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가 엄선한 조선 시대 유산기(遊山記)의 정수를 모은 책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 시대 산행기 560여 편 중 자연의 진면목을 대하며 정신적 자유를 되찾고자 한 사유 방식이 담긴 65편을 엄선했다. 도성의 선비가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오른 동네 뒷산에서부터 지금은 가 볼 수 없는 북녘의 명산까지, 우리 산 48곳에 대해 선인 56명이 남긴 기록이다. 심 명예교수는 국토 산하에 관한 옛 시문 연구와 유산기 논평을 종합해 엄선한 글을 섬세하게 번역하고, 현재의 의미에 비춰 해설한다.

유산기를 중부의 산, 남부의 산, 북부의 산, 민족의 성산 등 4부로 나누고, 5부에 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성찰한 산문 세 편을 실었다.

산행기에 빠져 읽다 보면 책 뒷부분에서 한문 원본을 볼 수 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더니, 역시 그렇구나 싶다. 옛사람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넉넉한 체력에 더해 정신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정신의 자유 속에서 진정한 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산을 오르며 내면을 채우는 일은 글을 쓸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산에 오르고, 글을 쓴다!’ 이것이 그들이 등산을 완성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유산록은 당대 사람들에게 산을 즐기는 특별한 매개체였다. 다른 이가 쓴 유산록을 읽고 문득 감흥이 일어 짚신을 새끼로 단단히 묶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서는 선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산, 다른 유산록을 썼을 것이다. 선인의 유산록은 오늘날 명문장과 옛이야기가 가득한 고전으로 남았다.

‘산문기행’에서 산의 참모습을 즐기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등산화 끈 조여 매고 뒷산이라도 오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