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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준의 음식 사람] <56> 경북 김천 ‘갱시기’

고구마·나물도 넣어 푹 끓인 김치국밥…귀한 쌀 아끼게 해준 음식

  • 최원준 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  |   입력 : 2022-04-26 20:13:31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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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에 갖은 식재료 넣어 끓여
- 식구들 한끼 해결하던 농촌 국밥
- 그중 가장 흔한 것이 ‘김치국밥’

- 예부터 철도 중심지인 김천서
- 바삐 떼우는 ‘역전 음식’ 발달
- ‘갱식’이라 불리다 ‘갱시기’로

- 김치·콩나물 있으면 만들지만
- 구황작물·국수·가래떡 등 넣어
- 뻑뻑할 만큼 푸짐하게 끓여야
- 김천표 갱시기 맛 제대로 나

과거 농촌지역에서는 보릿고개라는 배고픈 시기가 있었다. 가을걷이 후 이듬해 보리를 수확하기 전, 식량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을 이르는 말이다. 험한 고갯길을 넘듯 먹고 살기 힘든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일컫기도 한다.
갱시기 안에는 떡과 고구마, 콩나물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있다.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여느 집에서나 남아 있는 곡식에다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식재료를 함께 넣고 밥을 짓는다. 곡식이 부족하다 보니 이것저것 넣고 양을 늘려야 식구들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촌마을에서는 손에 잡히는 해초를, 산촌에서는 갖은 나물을, 농촌에서는 심지어 다 자라지 않은 보리싹을 작두로 잘게 썰어 넣고 밥을 해 먹기도 했다. 아니면 국이나 물에 밥과 남아있는 음식, 국수 등을 한데 넣고 뭉근하게 끓여서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먹어왔던 것은 김치와 콩나물, 국수 등속을 넣고 끓여낸 ‘김치국밥’이다.

김치국밥은 요즘에도 입맛 없을 때 개운한 한 끼 별미로, 전날 과음한 후 시원하게 먹는 해장국으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오래전 보릿고개 때에는 끼니를 늘려 먹는 대표 음식으로 맹활약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김치국밥을 여러 지방에서 김치국시기, 김치밥국, 갱시기, 갱죽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며 널리 먹었다.

■한 끼 식사로 든든한 보릿고개 음식

김천 갱시기를 솥에서 끓이고 있는 모습. 음식칼럼니스트 이춘호 씨 제공
그중 김천을 중심으로 대구, 경북지역에서 주로 먹어오던 갱시기가 대표적이다. 갱시기는 국물이 걸쭉하면서 그 안에 다양한 건더기가 모자람 없이 넉넉해 한 끼 식사로도, 영양식으로도 든든했던 보릿고개 음식이었다.

김천 갱시기는 일단 찬밥과 묵은김치가 기본이고 콩나물과 고구마 감자 등속이 들어간다. 여기에 떡국 떡이나 국수 등을 함께 넣어 먹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고구마와 감자를 넣어 건더기가 푸짐한 게 전형적인 김천식 갱시기이다.

그러면 이 갱시기가 왜 김천을 중심으로 유래된 것일까?

김천은 일제강점기에 경부선이 통과하면서부터 교통의 중심지가 된다. 이후 경북 북부지역을 잇는 경북선이 분기하고, KTX 경부고속철도 김천구미역이 개통되면서 경부선·경전선 KTX가 정차한다. 고속도로도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이 김천을 통과한다.

말 그대로 역마(驛馬)의 중심지 ‘역촌(驛村)의 도시’가 김천이다. 그러다 보니 역을 중심으로 짧은 시간에 바삐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식당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들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국밥이었다.

이 국밥은 원래 제사상에 올리는 갱(羹)에서 유래되었다. 제사에 올리는 ‘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국’이다. 여기에 밥을 말아 만든 음식, 국밥이 ‘갱식(羹食)’이다. 이 갱식을 역전 식당에서 외식화 하여 김천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역전 식당의 ‘갱식’이 김천의 가정으로 전해지면서 김치와 콩나물 등 집에 있는 재료들로 끓여 먹게 되는데, 이 음식이 ‘갱시기’이다. ‘갱식’이 김천식으로 편하게 발음되면서 ‘갱시기’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원은 ‘이미 지어놓은 남은 밥으로 다시금 끓여서 먹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다시 갱(更), 갱식(更食)이 갱시기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지역에 따라 갱시기국 갱죽 개양죽 갱생이죽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치, 밥 등 넣고 푹 퍼져야 제맛

갱시기 밥상. 음식칼럼니스트 이춘호 씨 제공
갱시기의 핵심은 맛있게 익은 김치와 밥이다. 거기다 집집마다 항아리에 길러 먹던 콩나물도 넣고, 대표적인 구황작물인 고구마나 감자 등도 넣는다. 집에 남아있는 나물도 있는 대로 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수를 넣어 음식량을 넉넉하게 늘린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떡국 떡을 넣고 끓여 먹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이나 집안의 형편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가 제각각으로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모양새는 볼품이 없다. 마치 꿀꿀이죽 같은 잡탕의 음식이다. 그러나 집안의 갖은 식재료를 넣고 끓여내었기에 익숙하면서도 맛 또한 괜찮은 음식이 갱시기이다. 별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고, 먹고 나면 든든한 건강식이기도 했다.

보기에는 설렁설렁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으로 생각되지만 조리법은 녹록지 않다. 김천 사람들의 말을 빌자면 “갱시기는 죽도 밥도 아니게 조리해야 한다”. “죽이라 하기엔 밥알이 살아 있어야 하고, 밥이라 하기엔 몇 번 씹지 않아도 꿀떡 넘어갈 만큼 퍼져야 제맛”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때 농번기의 인기 새참으로, 동네 대소사의 밥상에 단골 음식으로 오르던 때도 있었단다.

대구, 경북 음식 전문가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에 따르면 갱시기는 김천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특히 부항면이 ‘김천 갱시기의 본가’라고 알려준다. “김천 부항면의 갱시기는 뻑뻑한 느낌이 날 정도로 속이 푸짐합니다. 얼핏 김칫국과 비슷하지만 콩나물과 함께 감자와 고구마를 굵직하게 썰어 넣은 게 특징이지요.”

부항면 갱시기의 백미는 감자나 고구마를 건져 먹는 것이란다. “‘감자갱시기’는 어르신들이 좋아했고, 달콤한 ‘고구마갱시기’는 여성이나 아이들이 즐겨 먹었습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가래떡을 넣어 끓여 먹기도 했지요.”

갱시기를 잘한다는 식당에서 갱시기를 부탁한다. 갱시기 한 숟가락 뜬다. 진득한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속이 찌르르하다. 한 숟갈 두 숟갈 떠먹다 보니 어느새 속이 시원하게 풀린다. 떠먹을수록 멸치육수의 깊은 맛이 더 진해지고 개운해진다.

계속 먹다 보면 국물이 점차 걸쭉해지는데, 건더기와 함께 꿀떡꿀떡 퍼먹으면 속이 한없이 편안해진다. 밥알이 적당히 퍼져 뭉그러지지 않고 부드럽게 씹힌다. 김치와 콩나물은 아삭아삭하고, 떡국 떡은 쫀득쫀득한 식감이 참 좋다.

여기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고구마. 고구마의 달큼한 맛이 김칫국의 짠맛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아삭아삭 쫀득쫀득 달큼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에 정신이 팔려 어느새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배가 불뚝 일어선다. 여느 김치국밥과 달리 한 끼 식사로도 그저 그만이다.

적은 밥으로 많은 식구의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시절, 김칫국에 밥과 국수 고구마 등을 넣고 양을 늘려 먹었던 음식, 갱시기. 오래전 우리네 어머니들은 허기진 식구들의 늦은 저녁으로 김치 한 포기 숭숭 썰어 바글바글 맛있는 갱시기를 끓여주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네 어머니들의 그리운 손맛이 아스라해진다. 그런 음식이 바로 갱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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