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넣은 코로나19를 비롯해 기후변화, 자원 고갈, 핵 위험과 맞닥뜨린 사람들은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전망하곤 한다. 그러나 인지과학 분야 석학인 스티븐 핑커는 이러한 비관주의에 동의하지 않으며, 세상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핑커의 생각을 잘 드러낸 책이 바로 ‘지금 다시 계몽’이다. 2018년 출간된 이후 3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해 선보이게 됐는데, 페이지 수가 863쪽에 달한다. 일명 ‘벽돌책’으로 불릴 만큼 압도적인 분량의 책에는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계몽주의와 그 토대가 되는 이념(이성·과학·휴머니즘), 진보의 실재성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핑커는 진보에 대해 아주 쉽게 정의한다. 사람들이 가난보다 풍요가, 전쟁보다 평화가, 편견과 차별보다 평등한 권리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가치들이 시간과 함께 향상됐다면 그게 진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75개의 그래프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삶 건강 번영 안전 평화 지식 행복이 증가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진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작은 노력이 점진적으로 쌓인 결과다. 그는 ‘지식을 인류의 복리와 안녕을 증진하는 데 사용하자는 노력(계몽주의)’이 진보를 가져왔다고 본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진다고 여기게 된 것 또한 진보의 결과다.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이 높아지면서 이전에는 알아채지 못했을 위해를 경계하고, 그 결과 더 많은 부정적인 사례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염려하는 불행들은 세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기준이 상승했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핑커는 세계의 실제 상태를 확인하려면 ‘숫자’를 보라고 조언한다.

‘인간의 본성은 결함투성이지만, 그 안에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씨앗들이 담겨 있다’는 핑커의 말은 미래에 대해 과도한 냉소와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더불어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인정했듯 어떤 데이터 집합이라도 실재를 완전하게 반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또 하나의 의문점. ‘비관주의가 아닌 낙관주의가 우세했다면 지금과 같은 인류의 진보가 가능했을까.’

민경진 기자 j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