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손자와 일흔에 가까운 딸이 97세 할머니를 보살피는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내 외할머니 박옥기 여사가 떠올랐다. 저자가 할머니를 ‘피 여사’라 부르기 때문이었는지 내가 태어나서부터 7살까지 살았던 곳이 외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여사가 생각났고 박 여사의 찡그린 미간과 애정섞인 욕이 생각났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외가에 가는 일이 명절 외에는 거의 없어지자 박 여사는 가끔 전화로 “흥할년, 할매도 안 보고 싶나”하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당신 손으로 처음 기른 손주라 각별했고 욕도 아까워서 ‘망할년’이 아니라 ‘흥할년’이라고 했던 우리 박 여사. 본래가 신경이 예민하고 몸이 약한 양반인데 집안 살림에 시어머니 수발까지 박 여사는 항상 피곤했다. 그런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남동생과 나는 병원 입구에서부터 눈물이 터져 들어가지도 못했다. 박 여사가 떠난 지도 20년이 돼가지만 나에게 박 여사는 한 사람 뿐이고 그리움이고 포근함이다.

책 속 피 여사는 다리에 철심을 박아넣는 수술을 하면서 거동이 불편해졌다. 활동적이던 노인이 기동력을 잃자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외로움이었다. 사람들의 방문도 끊어지자 피 여사는 자신의 고립에 분노하고 슬퍼한다.

이를 달래 주려고 마흔 살 손자는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러다보니 손자의 잊혔던 기억과 상처도 다 되살아나 힘들었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려고 드니 자신까지 치유받고 추스를 수 있는 기회가 된 거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화장실 용무를 혼자 가릴 수 없게 된 할머니가 기저귀를 차자 손자와 딸은 외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대기조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피 여사의 수렁으로 박 여사와 내가 빠져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갓난 아이도 기저귀를 차지만 피 여사처럼 아프다고 불편하다고 자신의 괴로움을 끝없이 말로 토로하며 울부짖지는 않는다. “육아가 아이의 푸르른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면, 노인 돌봄은 암울한 죽음을 늦추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손자는 피 여사의 고맙다는 말에 이 모든 노고가 녹아내린다고 말한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피 여사처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살아내서 행복이 뭔지도 모르겠다는 사람에게도 행복의 순간은 있다고. 저자는 할머니를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도 들여다보고, 독자까지도 다독인다.

최영지 기자 jador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