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속道 교통섬에 떨어진 주인공
- 살아남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 불안·고독에 고통받는 심리 묘사
- 47년 전 문명 디스토피아 예언

대도시에서도 조난당할 수 있다는 상상은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에만 해도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 한가운데 밤섬에 고립된다는 설정의 영화 ‘김씨표류기(2009)’가 있다. 반경 수킬로 이내에서 살아가는 수백 만의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버려진 느낌. 영화 ‘캐스트 어웨이’ 같은 무인도의 조난과는 또 다른 공포를 안겨준다.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J.G.Ballard· 1930~2009)가 197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콘크리트의 섬’은 이런 상상의 원조격이 아닐까.

‘콘크리트 섬’은 세 갈래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아래 교통섬에 떨어진 중산층 남성이 완전히 고립된 후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밸러드는 타임스가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한 SF 작가다.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펼쳐진 세계를 예언적으로 그려낸 이 작가는 현대 문명의 병리학적인 잔혹상과 소비사회, 미디어 과잉으로 인한 일상의 통제, 기술의 비인간화 등을 ‘폭력’으로 본다. 그는 여러 작품에서 고도의 상징과 시각 이미지를 활용해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으로 그리며 그 속에서 불안과 강박, 고독에 고통받는 개인의 심리를 묘사했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콘크리트의 섬’은 어떤 교통사고로 시작된다. 런던 한복판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성공한 건축가, 메이틀랜드의 차량이 고가도로에서 추락해 전복된다. 그가 떨어진 곳은 세 갈래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아래 있는 교통섬이다. 지나가는 차량에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자신을 발견하고 정차하는 운전자는 없다. 차량이 설 일 없으니 황무지가 된지 오래다. 옛 영화관 건물 등 도시가 개발되기 이전의 흔적을 지닌 이 ‘섬’에 그는 파손되고 불탄 재규어와 함께 고립된 것이다.

아내와 애인은 각각 자신이 다른 상대와 있겠거니 생각할 테고, 직원들도 평소 교육시킨대로 그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조성한 자유로운 환경 때문에 그의 실종 또한 한동안 알려지지 않게 된 셈이다.

탈출을 시도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메이틀랜드는 젊은 여성 제인과 원시부족민 같은 느낌을 주는 프록터 덕분에 목숨을 구하지만, 정신을 차리면서 이들의 행동과 사고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교통섬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에 제인은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며 회피한다. 프록터는 메이틀랜드가 탈출함으로써 생겨날 새로운 상황에 잔뜩 겁을 먹고 있다.

제인과 프록터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를 둘로 나눠 놓은 것 같은 캐릭터다. 그렇다. 이 소설은 의도적으로 조난과 고립의 원전 ‘로빈슨 크루소’의 아이디어와 구성, 그리고 인물을 따르고 있다. 재규어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물품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는 메이틀랜드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익숙한 플롯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종국에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복된다.

세계적인 SF작가의 작품이라기에는 과학적 상상과 거리가 멀어 의아할 수도 있지만, 공상 속 ‘우주’를 사람 안의 우주, 사회 안의 우주로 전환해 문학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이 장르 문학의 새로운 차원을 개방한 작가의 천재성을 가늠한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