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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109> 김민정 작가 그림 에세이 ‘어딘가에 있는, 어디에도 없는’

사라질 운명의 낡은 집들, 그 소중함을 담아낸 ‘부산의 그림일기’

  • 박현주 책칼럼니스트
  •  |   입력 : 2021-06-27 19:34:31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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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서 태어나 미술 전공한 작가
- 주거 관련된 도심 풍경에 큰 관심
- 매축지·봉산마을 등 직접 걸으며
- 개발로 급변한 모습을 그림 작업
- 주민 이야기도 화폭 속에 담아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은 10년까지 걸리지도 않는다. 여기에 원래 무엇이 있었던가 되짚어 볼 사이도 없이 새 건물이 올라서고, 새 길이 생긴다. 조금씩 변해가는 곳도 있지만,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어렸을 적 살았던 김해의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마을을 통째로 도려내어 들어내기라도 한 듯 달라져버린 풍경에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다. 낡은 동네의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이었을까, 도시 계획의 일환이었을까. 받아들여야 하는 변화였겠지만, 결국 필자의 유년시절 풍경은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미술작가 김민정의 그림에세이 제목 ‘어딘가에 있는, 어디에도 없는’처럼 말이다. 이제는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다. 도시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매일 달라진다. 세월 속에서 낡은 집들을 허물고 높은 건물을 짓거나, 오래전 물길을 되살리기 위해 시멘트 덩어리를 걷어내기도 한다. 그런 일들은 도시건축이나 사회 이슈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김민정 작가의 시선은 다른 시각을 열어준다. 부산 감만동 감만창의문화촌에서 김민정 작가를 만났다.
개발로 사라졌거나 사라질 부산의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해 온 김민정 작가를 부산 감만동 한 골목길에서 만났다.
■오래된 집들을 바라보다

김민정 작가는 198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학원에 다닐 때 다른 친구들은 1시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전 3시간 넘게 꼼짝 않고 그리곤 했어요. 학원 선생님도 가만 내버려두었어요. 그림에 빠져 있는 저를 예쁘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구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미대로 진학을 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네가 미대에 갈 줄은 몰랐다’고요.” 어머니의 말씀이 재미있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좋아하는 그림 위에서 차근차근 걸어온 걸음은 그에게 화가라는 이름을 주었다. “대학 졸업전시회에 저의 자화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요. 전신상이었어요.” 그는 휴대폰에 저장한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어딘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생각에 잠겨있기도 한 모습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 같고 자유롭지 못한 심정이 느껴졌다. 그의 자화상이지만, 현대사회 젊은이의 초상으로 다가왔다.

어딘가에 있는, 어디에도 없는- 김민정 / 호밀밭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무엇을 그려야 하나’라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자화상만 계속 그리면서 끌고 나가기 힘들었거든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즈음, 주변풍경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집 안의 풍경, 창문 밖의 풍경,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김민정 작가는 그렇게 시선을 내면에서 외부로 옮겼다. 그는 도시 풍경 중에서도 주거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작가는 부산 매축지마을 감만1동 영도 봉산마을 온천1동의 넓고 좁은 골목을 직접 걸었다. 오래된 집들은 한 가족의 삶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겠지만,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개발로 인해 순식간에 변화하는 일상의 단면을 수채화, 유화로 그렸다. 오랫동안 사라지는 도시 풍경에 주목해 온 작가는 독립 출판을 통해 ‘도시 속의 섬’(2017)과 ‘사라지는 집’(2019)을 펴낸 바 있는데 이 책으로 함께 엮었다. 도시재생 재건축 재개발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오늘날, 우리들 삶의 풍경들은 빠르게 지워지고 변해간다. 사라지는 도시 풍경을 수채화로 기록한 이 책은 마치 소중히 간직하고픈 ‘부산의 그림일기’ 같다.

■집이 곧 삶이라고 말해주는 그림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라가는 아파트를 그리기 위해 매축지 마을을 보러 갔던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어땠을까. 좁은 골목길의 낡은 집 뒤로 공사 중인 아파트가 보이는 그림을 그린 작가는 이런 글을 덧붙였다. “나는 처음 이곳으로 향할 때 기대했던 풍경을 찾아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멀리 보이는 공사 중인 아파트의 모습을 쫓아갔다. 사실 그 건물은 워낙 커서 마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그것과는 좀 다른 어떠한 장면이 있었다. 완벽한 대조와 병치, 마을의 허름한 골목 풍경과 공사 중인 거대한 콘트리트 덩어리의 묘한 동질성을 가진 대조.” 곧 허물어질 집에는 켜켜이 쌓인 삶이 있을테고, 곧 완공될 아파트에서는 새로운 삶이 쌓여갈 것이다. 그림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삶과 세월이 있다. 낡은 집의 문을 열면 꼭 그만큼 세월의 표정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김민정 작가와 함께 아파트가 아니라 집이 있는 길을 걷고 싶었다. 감만창의문화촌을 나와 옆 동네의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벽화가 그려진 좁다란 골목, 크고 작은 돌로 쌓아올린 돌담, 담 위로 보이는 나무, 닫혀있는 대문…. 그 소소한 풍경이 작가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책에서 작가의 마음을 읽어보았다. “골목길을 무작정 걸어 가보고, 새로운 길을 찾고, 다녔던 일을 이어나가면서 서서히 동네와 익숙해지는 과정은 혼자만 아는 비밀처럼 소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민을 만나 동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네와 얽힌 드라마 같은 그들의 개인사를 듣게 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백지상태였지만 제가 느낀 감정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뒤섞여 머릿속에 밑그림이 그려지고 동네에 대한 인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하나의 동네를 조금씩 알아갑니다.”

철거될 집을 사진으로 찍고 작업실에 돌아와 스케치를 하면서 구도를 잡아본 뒤, 그림을 그렸다. 골목길을 걷는 길도 계속 되었다. “재개발을 앞둔 집에는 ‘철거’ ‘공가’라는 붉은 페인트 글씨가 있었죠. 번지수가 있었던 그 집들은 이제 없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어디에도 없는’ 집이고, 동네입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사라진 집들을 본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집이 곧 삶이라고 말해주는 그림이 가득한 전시실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 그리운 동네 풍경, 어릴 적 그 집이 담긴 그림일기를 찾은 마음은 덤이다.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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