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0년 건륭 황제 칠순잔치 때
- 축하 사절단 동행해 쓴 견문록
- 유교에 심취해 뒤처진 조선 위해
- 주변 정세 익히고 새 문물 캐내

- 조약돌 깔아 진창길 막는 기술과
- 깨진 기와로 쌓아낸 담에 탄복
- 실용주의 위대함 세세하게 담아

- 반어법 풍자와 필력 당대 최고
- 청 배척주의에 한때 금서 낙인
- 초고본 ‘자기검열’ 맘고생 짐작
- 필사본은 윤색·수정 사례 많아

중국 허베이(河北)성 북쪽엔 러허(熱河)강이 흐르고, 서쪽에 청더(承德)가 자리 잡았다. 옛 지명은 러허성이다.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淸)은 만리장성을 벗어난 여기에 황제 피서산장을 차려 놓고 주변 소국을 다스렸다.

	연암이 낀 조선 사절이 방문한 청 러허(熱河)는 현재 중국 허베이성 청더이다. 당시 황제 여름 별장이자 임시 집무소인 피서산장이 자리 잡았다. 러허 피서산장에서 황족 대신들에게서 조례를 받는 건륭제.

이곳을 241년 전인 1780년(정조 4년) 44세 조선 선비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다녀왔다. 건륭 황제(6대, 1711~1799)가 맞은 70돌 생일을 축하하고자 파견된 조선 사절에 민간인 신분으로 끼었다. 연암이 관광만 했겠는가. 자유로운 신분을 십분 활용해 그곳 정세와 새 문물을 캐냈다. 귀국할 때 연암 보따리가 불룩했다. 그 안에 든 건 먹 냄새 풍기는 종이 뭉치. 3년 뒤인 1783년 한문으로 펴낸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예서 나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연암은 청에 입국하자마자 여기를 되놈 나라라고 깔보는 풍조야말로 허망한 자위임을 깨닫는다. “이게 약소국 지식인이 할 바다.” 밖으로 나라 문을 활짝 못 여는 조국과 헐벗은 백성을 떠올리며 눈에 불을 켜고 관찰·기록한다. 청나라 동네 우물까지 꼼꼼히 살폈다. 기구를 이롭게 사용해[利用] 백성 살림을 윤택하게 만듦으로써[厚生] 덕을 바로 세운다[正德]는 실학 정신을 압록강을 건너며 가슴에 되새겼던 연암.

드디어 청 여행이 시작됐다. 길 가다 가게를 들렀는데 벽지에 쓰인 이야기를 읽고 포복절도한다. 즉석에서 베껴 옮겼다. ‘호질(虎叱)’, 양반 위선을 까발린 한문 단편소설이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로 왔다.

	연암이 그린 묵죽도.

그는 조선에 없는, 표준화된 청나라 수레 제도가 가진 힘을 알아봤다. 수레는 미개발지에 길을 만들어 사람·재화·문화를 불러들였다. 물류는 나라를 강성케 하는 공공재. 청은 쉽게 찍어내도록 규격화된 벽돌로 잘 정비된 도시를 조성했다. ‘지게’와 ‘비탈길’을 못 벗어나는 게 지금 조선 현실. 청나라 말[馬]은 많고 강건하다. 강한 군사력과 동의어다. 청은 말 목축을 융성하게 일으키지만, 조선은 그렇잖다. 머리와 복장은 어떠한가. 청 무관은 변발에 소매 좁은 옷을 입고 말을 잘 탄다. 조선 무관은 소매가 너풀거리는 철릭을 입는다. 이런 게 하나둘 쌓이면서 조선은 문약해졌다고 연암은 생각한다. 조선 문인은 무술을 익히기는커녕 책만 갉아 먹는다. 벼슬아치는 그저 태평이다. 연암이 구사하는 반어법이 통렬하다. “삼류 선비인 나는 감히 말한다. 내가 청나라에서 본 가장 기억에 남는 장관은 깨진 기왓장, 시냇가 조약돌, 냄새나는 똥거름 더미라고.” 청나라 민중은 쪼갠 기왓장을 모아 담을 쌓고, 말똥을 쌓아 올려 거름으로 비축하며, 조약돌을 집 앞 도로에 깔아 진탕을 막는 실용주의자. “이제 북벌론을 거두고 필요한 청 문물을 수용할 때다.” 명나라 사대부가 가진 ‘흰 손’과 여인에게 강요된 ‘작은 발’은 청나라 변발과 준마에 무릎을 꿇었잖은가.

청나라와 주변 정세를 예리하게 읽어낸다. “황제는 천하 두뇌인 러허를 깔고 앉아 몽골 숨통을 죈다.” 연암을 포함한 사절단도 예상 못 하다가 급박하게 러허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주변국을 순치하는 현장을 포착한다. 건륭 황제는 티베트 라마교 지도자를 스승으로 초대해 화려한 사찰을 지어 머물게 했다. 부드러운 감금이다. 이런 정세가 언제 조선에 화를 미칠지 몰라 실상을 자세히 캤다. 연암이 현재 미국·중국 두 열강에 낀 한국 상황을 안다면 달리는 호랑이에 올라탄 처지라고 걱정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선진 지역을 시찰하러 외국에 간다면 자신이 청에서 보인 열성을 반이라도 가지라고 요구할지 모른다.

	열하일기(전남대 소장본).

‘열하일기’는 저자 생전에 활자로 출판되지 못한 채 인기리에 필사돼 읽혔다. 현존 ‘열하일기’ 초고·필사본은 40종을 넘는다. ‘열하일기’는 한동안 공공연한 금서였다. 당시 조정과 양반엔 청을 배척하는 기류가 드셌다. 개혁 군주 정조는 자유분방하고 구어를 쓰는 연암 필체를 잡문체라고 비난하며 순정한 옛 문체로 되돌리라[文體反正]고 다그쳤다. 이런 겁박은 우의정을 지낸 손자 박규수(1807~1877)가 ‘연암집’(1932년 박영철이 17권 6책으로 처음으로 활자 출간) 간행을 미루는 사태로 이어졌다. ‘열하일기’는 1911년 최남선이 세운 조선광문회가 처음 단독 출간했다.

연암은 이런 압박에 버텼지만, 마음고생이 없지 않았다. 현대 후학들이 친필 초고본과 이본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자기 검열 흔적이 그 증거. 연암은 여행 중 일행 모르게 밤중에 숙소를 벗어나 시내에서 현지 지식인과 필담하며 밤을 새우고 돌아왔는데 다음 날 아무도 모르자 ‘심리암희(心裏暗喜, 속으로 기뻤다)’라 적었다가 먹으로 지웠다. 청 농민이 닭 기생충을 없애려고 털을 뽑은 채 흉하게 키우는 장면, 당시 박해를 부른 천주교와 관련된 교리, 지구는 작은 별로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대목 역시 본인이 삭제했다.

필사하는 이가 윤색·수정하는 사례가 많았다. 연암은 유학에 기반한 도덕관과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내세운 국시 따위를 좇지 않았다. 필사자는 청나라 연호(건륭)를 삭제하거나 명나라를 높여 표현하고, 사대부가 교양 없어 보인다며 일부 원문을 손댔다. 예를 들어 청나라에 입국해 든 여관에 사는 주인장 모친을 본 연암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다’라 묘사했는데 번역본(박영철본)에는 ‘그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다고 한다’로 고쳐 놓았다. 다행히도 한학자 이가원(1917~2000) 선생이 소장했던 ‘열하일기’ 초고본이 2012년 공개된 뒤 원본이 점차 회복돼 우리는 실체에 가까운 연암을 만난다.

당대 주류는 연암이 가진 시대 인식을 타박했지만 탁월한 필력 앞에선 백기를 들었다. ‘열하일기’ 중 러허 기행문인 ‘산장잡기(山莊雜記)’에 실린 9편 글. 이 중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는 연암을 조선 최대 문장가이자 사상가로 밀어 올린 산문이다. 연암은 코끼리에 대한 단상인 ‘상기’에서 주자학은 경직된 사고이며 끝없이 변화하는 만물을 열린 시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썼다.

이 고전은 청나라 다큐멘터리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숙한 여행객은 꾀바른 현지 장사치에게 먹잇감. 연암도 길가에서 참외 파는 늙은이에게 바가지를 쓴다. 앞서 지나간 일행이 참외값을 떼먹고 자기를 욕보였다고 눙치는 데 깜빡 속아 참외를 비싸게 산다. 큰 체구에 목소리가 우렁찼던 연암. 술고래 인데다 시서화에 능하고 박학다식해 현지 지식인을 압도하면서 환대받았다. 그런 그도 청나라 평민에게 서예를 뽐내다 실수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장신구점 주인에게 밀가루 가게에 내거는 글씨를 써줬기 때문. ‘그 주인이 이 때문에 인상을 썼는데 난 무식쟁이라 속으로 욕했구나’. 초상집 구경에 나섰다가 생면부지 상주에 손목을 잡혀 꼼짝없이 문상하는 소탈한 연암이다.

그는 작가로서 창작 정신이 치열했다. 가령, 우리 일상 용어를 한자로 새롭게 만들어 썼다. 가게를 ‘假家’, 상모를 ‘象毛’로 적었다. 정통 중국식 한문은 이를 각각 ‘巷肆’ ‘毦’로 표기했다.

연암은 청을 보며 중화(中華)와 오랑캐[胡]란 두 단어 사이에서 고뇌하며 조선이 나갈 길을 찾았다. 우리는 지금도 그 중국을 머리에 이고 산다. 아래쪽엔 중국보다 더한 일본이 도사렸다. 오늘날 중국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타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방법을 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두 나라에 제대로 대응하는 걸까. 18세기 연암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서평가·세상관찰자